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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의료서비스 “인정 넘치는 의료봉사, 오래 계속되길…” 이연철

“가시리 가시리 있고, 버리고 가시리 있고….”
백제시대의 노래 ‘가시리’는 그 무대가 정읍이다. 멀리 장사하러 간 남편이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달빛 교교한 들판에 나와 이제나 저제나 남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부르는 노래가 바로 ‘가시리’다. “아으 동동다리”라는 애절한 탄식으로 끝나는 후렴구로 보아서는 남편이 끝내 나타나지 않은 것 같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진료는 시작되고
우리 민족의 오랜 서사(敍事)가 남아있는 정읍. 광주가 빛고을, 전주는 온고을이라면 정읍은 샘고을이다. 샘이 많아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아도 실제로 정읍은 가뭄을 모르는 고장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찾아가는 의료서비스’를 떠나는 날, 아침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나중에 뉴스를 들으니 몇 시간동안 400mm가 쏟아졌단다. 정읍에서 기상관측한 40 몇 년 만의 최고기록이다.
찾아가는 의료봉사는 그런 폭우에 아랑곳하지 않고 진행됐다. 아침 8시부터 준비하여 8시 30분 의료진과 장비를 실은 의료버스가 빗속을 뚫고 출발했다. 목적지는 이평면 마항리 요동마을이다. 동학혁명이 시작된 고부현이 인근이고, 동학 최후의 격전지인 황토현도 가까운 동학혁명의 고장이다.
의료버스는 20분 만에 도착했다. 의료팀은 비를 함빡 맞으며 임시 진료실인 마을회관에 의료 장비를 세팅했다. 누가 뭘 지시하지 않아도 숙달된 동작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전문의를 비롯한 간호사 2명, 직원 등 모두 8명이 오늘의 의료팀이다. 진료버스에는 흉부 엑스선을 찍을 수 있는 장비도 있다.
“비가 많이 와서 일을 나가지 않으니까 찾아오는 환자가 많을지, 아니면 반대로 적을지 모르겠네요.”
 오늘 행사를 준비한 총무과 유현주 씨가 비를 쏟아 붓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다. 정읍병원 근무 20년이 넘지만 찾아가는 의료서비스 팀을 직접 총괄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어서 마음 부담이 크다.  아니나 다를까, 진료시간인 9시가 되었는데도 찾아오는 주민이 없고 빗줄기는 더욱 거세진다. 오늘의 예상 진료인 숫자는 60여 명. 오전만 진료하는 것이므로 예상대로라면 정신없이 바빠야 한다.
석전마을의 주민인 조성훈 씨가 나서서 여기저기 전화를 건다.
“비 옹께 누가 가냐고? 아따, 우산 뒷다 뭐하게. 이런 날 쓰라고 맨든 거 아녀? 뭔 소리여, 싸게 싸게 오더라고.” 정다운 사투리가 오간 덕분에 잠시 후 빗줄기를 뚫고 우산을 받쳐 쓴 할머니들이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진료가 시작된다.

고창ㆍ부안 등지에도 의료 손길
정읍아산병원의 손길이 미치는 곳은 정읍을 중심으로 고창, 순창, 부안 등이다. 지금이야 어디든지 1시간 이내에 닿을 수 있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꽤 먼 곳이었다.  30여 년 전 병원이 처음 설립되었을 때는 전라도 전역을 커버했고 순회 진료도 더 자주 했다. 그러나 요즘은 교통이 워낙 좋아져 예전만큼 순회 진료를 많이 나가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게 을마나 좋은지 몰러. 마을까지 찾아와서 진찰해주지, 약도 공짜로 주지, 이런저런 검사도 해주지, 차 없는 늙은이들에겐 최고여.”
진료를 마친 이선숙 할머니의 칭찬이 아니더라도 이른 아침부터 준비하고 봉사하는 의료팀을 보면서 쉽지 않은 일을 즐겁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농협이나 지역 직장과 학교 등과 상의하여 순회 진료를 많이 했습니다만 이제는 의료서비스 받기가 좋아졌고, 종류도 다양해져서 찾아가는 의료서비스를 자주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지역은 전통적인 농촌이라서 고령화 환자가 많고, 대부분 근골격 질환입니다.” 19년째 근무하고 있는 박용덕 총무계장의 친절한 설명이다.  찾아가는 의료 서비스 중의 하나로 가정간호사 제도가 있는데 이것도 환자가 점차 줄어가고 있다.
“집으로 환자를 찾아가 장기치료 중인 환자들의 치료는 물론 욕창이나 대소변까지 처리해주는 궂은일을 하지요. 대부분 노인분들로 만성질환을 앓고 있어요. 이제는 요양보험제도가 있어서 가정보다는 더 좋은 장기요양시설로 들어가 치료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전히 아름다운 풍경
이 제도가 시작된 2006년부터 6년째 같은 일을 하고 있는 박경숙 간호사의 말이다. 정읍아산병원에서 제일 먼 곳은 삼례로, 100km 남짓이다. 혼자 차를 몰고 다니며 진료한다. 의료서비스 제도 자체가 좋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리운 것은 사람의 목소리며, 인정이다. 그래서 환자들은 가정간호사들이 집으로 방문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같은 마을 안에서 노인들끼리 서로 연락하며 돕는 ‘노인 돌봄이’ 제도도 있는데, 불의의 사고를 예방하는 데 좋은 효과를 보고 있다.
비가 쉬지 않고 내리는 가운데 진료를 받기 위해 주민들이 삼삼오오 우산을 쓰고 꾸준히 임시 진료실을 찾아왔다. 불편함을 무릅쓰고 진료하는 의료팀이나 찾아오는 주민 모두 환한 얼굴들이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아름다운 현장. 이런 곳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엔도르핀이 솟는 기분이다.  언젠가는 추억 속으로 사라질지도 모르는 찾아가는 의료서비스지만 여기서 나누는 인정만큼은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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