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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취재 아산의 큰 정신을 가슴에 품다 손미경

스무 살 언저리의 대학생들은 정주영 아산재단 설립자를 가까운 역사 속의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울산의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를 견학하며 그 역사의 인물은 현재로 옮겨졌고, 한 사람의 큰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설립자와 현대그룹이 모든 풍경의 중심이 되는 울산은 여기를 봐도 ‘현대’ 저기를 봐도 ‘현대’다. 기업, 학교, 백화점, 병원 이름 앞에 붙여진 ‘현대’는 학생들의 머리와 가슴을 꿈틀거리게 했다. 그리고 그 꿈틀거림은 길 위에까지 이어졌다. 반듯하게 닦인 도로 노면과 표지판에 쓰인 글자가 바로 길을 만든 설립자의 아호인 ‘아산(峨山)’이다. 견학버스 안에서 한 학생이 “이 정도까지인 줄 몰랐어요”라고 했을 때 대부분의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규모에 놀라고 신화에 감동하다
8월 18일 목요일 아침, 첫 견학 장소인 현대자동차를 방문했을 때 학생들이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감탄사 “와~”였다. 세계 100대 브랜드 중 하나, 자동차 판매량 세계 5위의 자동차회사답게 현대자동차의 규모는 학생들에게 상상 이상이었다.
1967년 현대자동차 설립 당시 국민들이 지금의 현대자동차를 상상할 수 없었듯, 학생들도 견학 이전까지 들은 입소문만으로 막연하게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장이 생각을 뛰어넘게 한 것이다. 학생들은 1968년 착공과 1975년 준공을 시작으로 현대자동차가 어떻게 한국 자동차의 자존심이 되었으며 또 세계 속의 기업이 되었는가에 대한 답을 스스로 내릴 수 있었다.
욕심 같아서는 긴 시간 머물며 자동차가 완성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지켜보고 싶었다는 학생들. 그러나 2박3일의 일정 안에 주어진 시간은 아쉽게도 일부 조립과정 견학만이 가능했다. 다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학생들의 감탄사가 다시 한 번 터진 곳은 바로 현대중공업이다.
일제히 창가 쪽으로 시선을 모은 학생들 눈에 보인 것은 집채보다 더 큰 엔진과 완성 전의 선박들. 그 순간 학생들 입에서 일제히 튀어나온 말은 “학교 운동장보다 더 크다”였다. 40여 년 전 한국에 조선소 하나 없었음에도 거북선 그림이 그려진 지폐 한 장 달랑 들고 영국 은행에서 조선소 건립용 차관을 들여온 설립자. 그 일화 하나로 학생들은 현대자동차에서처럼 현대중공업이 어떻게 세계 최대의 조선소가 되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현대그룹은 제게 늘 선망의 대상이었어요. 그래서 아산장학생으로 견학에 참여한 것이 영광스럽습니다. 특히 이번 견학이 제게 더욱 특별한 것은 앞으로 현대중공업에서 일하고 싶은 바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취업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제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내년쯤에는 현대중공업에서 새내기 직장인이 돼 있을 양잉찬(한국해양대학교 기계정보공학부 3) 학생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후원해 준 회사의 일원이 되는 것, 이 또한 멋진 일이 아닐까.
반드시 할 수 있다는 긍정적 사고,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는 도전정신, 일관된 노력이 만들어 낸 설립자의 신화를 견학을 통해 과거가 아닌 현재로 가슴에 품은 학생들은, 그래서 현대중공업을 나서는 길이 가볍지 않았다.

다양한 프로그램, 다양한 경험
아산재단 장학생들은 매년 여름방학에 농촌 봉사활동 또는 산업체 견학에 참여하고 있다. 장학금을 받는 대학 2~4학년 3년 중에 2년은 농활을, 1년은 견학에 참가하는 것이다. 작년에 충남 보령에서 농촌 봉사활동을 했던 장학생들은 올해는 재단 측이 마련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외에도 현대예술관, 울산과학대, 울산 반구대 암각화, 경주 양동마을 등을 두루 견학하며 알찬 시간을 가졌다. 아울러 보안 때문에 현대중공업과 자동차에서 사진촬영을 못한 아쉬움을 풀 수 있었다.
현대중공업에서 지원하는 현대예술관은 한 기업이 지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학생들은 움직이는 미술전으로 유명한 ‘키네틱 아트전’을 관람하며 고정관념에서 탈피한 예술과 만났다. 초대 이사장인 설립자의 창학정신이 깃든 울산과학대학 지하 아이스링크에서 스케이트를 탄 학생들은 가장 신나는 프로그램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울산의 젖줄인 태화강 상류의 반구대 암각화는 아쉽게도 물에 잠겨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늦가을부터 늦봄 사이에 오면 볼 수 있다는 말에 하룻밤 지내며 친해진 장학생들과 다시 와볼 것을 약속하기도 했다. 양반 가옥과 초가집이 조화를 이룬 경주 양동마을에서는 사람과 자연을 품을 줄 알았던 옛 조상들의 지혜를 보았다.
“TV나 언론에서만 보던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의 현장을 직접 볼 수 있었던 것도 좋았지만 이렇게 한국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까지 주어져 저희 모두 매우 알찬 느낌을 받았습니다.”
8월 17일부터 19일까지 2박3일의 일정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이처럼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인해 더욱 긍정적이었다. 그리고 19일 오전, 양동마을을 끝으로 일정을 마친 학생들은 시간이 빨리 지나간 이유가 그 때문이었노라고 했다.

우리가 바로 동경의 대상인 것을
17일 저녁, 전문 사회자가 초빙된 레크리에이션 시간을 통해 ‘나’를 소개한 학생들은 18일 저녁 자신들만의 시간을 보냈다. 아산재단에서 마련한 바비큐 파티에 이어 모두 참여할 수 있는 게임으로 남아 있던 어색함이 완전 해제되었다.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동참할 수 있는 게임으로 준비했어요. 준비를 위해 임원들이 사전에 두 번 정도 만나 꼼꼼히 체크하고 게임에 필요한 것들을 만들었어요.”
게임 사회를 맡았던 부회장 김은희(경복대학교 치위생과 3) 학생은 두 시간 넘는 시간 동안 꼬박 마이크를 잡아 끝날 무렵에는 목이 쉴 정도였다. 물론 첫 진행이었던 만큼 중간 중간 실수도 없지 않았으나 그조차 학생들에게는 웃음 코드였다.
그날 밤, 학생들은 이틀 동안 한 이불을 덮고 잤던 숙소 친구들과 소주 한 잔 곁들인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일상 밖으로 나왔다는 자유로움, 머리와 가슴에 콕 박힌 아산의 위대한 영향력, 모두 공감하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불안은 1백여 명의 학생들을 하나로 엮었다. 새벽녘까지 잠들지 못한 마지막 밤, 부산대 경제학과 4학년 김병규 학생은 “아산장학생으로 혜택을 받은 것이 감사하다”고 했다. 또 많은 학생들이 올 때는 어색함을 어떻게 견디나 했는데 헤어질 시간이 점점 다가오면서 짧은 시간 든 깊은 정을 어떻게 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별의 시간, 학생들은 가장 수고가 많았던 회장 김수빈(서울대학교 식품동물생명공학부 3) 학생을 비롯한 임원진과 아산재단 직원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길, “젊은 시절 어느 학교 공사장에서 돌을 지고 나르면서 바라본 대학생들은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나에게는 한없는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이었다”는 설립자의 말이 학생들에게 왜 더욱 깊게 파고들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필요치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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