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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크나큰 완성을 위하여 정현종

내가 학교에 있을 때 가을이면 학생들과 함께 읽은 시가 두 편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과 ‘가을날’. 가을을 노래한 시는 수없이 많지만 릴케의 이 두 작품만큼 우리의 마음 깊은 데를 울리면서 애송된 작품은 흔치 않을 터이다. 우선 조금 더 알기 쉽고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가을날’을 읽어 본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드리워 주시고 / 들판에는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열매들이 살찌도록 부추겨 주소서. / 그들에게 이틀만 더 따뜻한 날을 주시고, / 크나큰 완성을 이루도록 해 주시며, /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맛이 들도록 해 주소서. /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앞으로도 짓지 못할 것입니다. / 지금 홀로 있는 시간은 줄곧 홀로 있을 것이며, / 잠 못 들어,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요, / 낙엽이 바람에 불려 갈 때 /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헤매일 것입니다.

여름을 ‘위대한’이라는 말로 수식한 것은 그 계절이 모든 게 무성하게 자라는 때요, 곡식과 과일도 익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여름이 모든 생명체가 번성하는 때라는 것은 겨울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올해(2011년) 한국의 여름을 ‘위대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 8월 중순인데, 6월 하순부터 지금까지 햇빛다운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줄곧 비가 쏟아졌다. 물난리는 말할 것도 없고 햇빛을 못 받으니 곡식과 과일이 제대로 익지 못했을 것이다. 동물들도 폭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예컨대 계란이나 우유의 생산량도 많이 줄었다고 하고, 사람들도 우울할 수밖에 없었다. 인류사회는 유례없는 기후변화를 겪고 있는 것인데, 그로 인한 재앙은 이제 일상사가 될 듯하다.

사정이 그러하니 시인이 둘째 연에서 하고 있는 기도는 바로 우리가 하고 싶은 기도가 아닐 수 없다. 우리도 열매들이 살찌고 포도송이에 단맛이 들도록 며칠만이라도 햇빛을 보내달라고 푸념 섞인 기도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의 기도에서 주의해 볼 것이 있는데, 말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같은 내용이라도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 효과는 달라진다. 가령 ‘풍년이 들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상투적이어서 말발이 서지 않게 된다. 그와 달리 시인은 열매들이 살찌도록 ‘부추겨’달라고 하며 그들에게 ‘이틀만’ 더 따듯한 날을 달라고 한다. 한편 열매가 잘 익는 것을 ‘크나큰 완성’이라고 표현하며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맛’이 들도록 해 달라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먹을거리를 위한 농사가 잘 되게 해달라는 범상한 기도이지만 그 독특한(그러나 전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표현 때문에 비범한 기도가 되며 따라서 비교할 수 없는 효과를 거두게 된다. 즉 자연의 전 과정이 신성하게 느껴지고, 먹을거리를 위한 노동인 농사도 신성한 것이 되며 또한 아주 드문 마음-그 진정성의 밀도가 ‘단맛’을 듬뿍 맛보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말하자면 단어 하나, 표현 하나가 전존재(全存在)를 흔들어 사물을 보는 눈, 세계를 보는 눈을 전적으로 새롭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농사)은 신성하다’라는 진술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쉽게 느낄 수 있을 터인데, 하나는 추상적이고 다른 하나는 심신을 파고들 만큼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인들 왜 귀 기울이지 않겠는가.

가을의 정서나 생각이 결실을 둘러싸고 움직이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인데, 위에서는 ‘열매’가 그 중심에 있었으나 마지막 연에서는 그 초점이 ‘사람’에게로 옮겨 온다. 첫 줄에서 시인은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앞으로도 짓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집’은 사람이 사는 집을 뜻한다기보다 ‘열심히 하면 결실을 본다’고 할 때의 ‘결실’ 또는 ‘성취’를 뜻한다고 보는 게 좋다.

상투적인 비유 중에 가을=만년이라는 게 있다. 인생의 가을이라는 것이다. 만년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성취한 게 없다면, 즉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앞으로도 짓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는 그럼직하다.

물론 예외는 없지 않다. 옛날에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읽은 얘기인데 70대 초에 화가로 데뷔한 사람에 관한 기사이다. 래리 리버먼이라는 할아버지는 그날도 친구와 체스를 두러 노인정에 나갔는데 그 친구가 감기 때문에 나오지 못했다. 실망을 하고 돌아오려고 하는데 그곳 여직원이 그림방에서 그림이나 그려 보시면 어떻겠느냐고 했고 그래서 그려 보았는데 여직원이 보니까 보통 솜씨가 아니어서 몇 군데 신문과 방송에 연락을 한다. 모두 놀라워하며 보도를 했고 그 후 여러 도시에서 개인전을 했으며 미술관들이 소장하는 화가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잡지에 그림이 소개되어 있었는데, 말하자면 샤갈풍의 동화적인 그림이었다.

그 뒤부터 나는 어떤 분야의 예술이든 70대가 지나기 전까지는 재주가 없다는 얘기를 안  하기로 했지만, 요새는 그런 예외의 숫자도 늘어나고 있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서 ‘가을날’의 끝 연은 릴케가 집을 떠나 파리에서 나그네로 살 때 쓴 것이라는 사정을 염두에 두더라도 ‘집(성취)’에 대한 구절은 어떤 교훈적인 얘기보다도 가슴에 오는 어법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가을에 누구나 느끼는 쓸쓸함에 물들어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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