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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그대가 되어 “남편이 이토록 좋은 줄 몰랐어요” 이인영

전북 군산 운회리의 한 동네 끝자락에 오영자(39) 씨가 사는 집이 있다.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남편과 두 딸, 왼쪽 몸을 못 쓰는 시아버지, 그리고 치매로 얼마 전에 요양원으로 모신 시어머니가 그의 가족이다. 현재 대학생인 오영자 씨는 1998년 결혼 후 지금까지 가족의 수발을 들며 중심에 서서 가정을 지켜왔다.

마침 ‘교육자의 날’이라 딸 둘이 집에 있다.
“안녕하세요.” 튀어나와 맞아주는 막내딸 초원이(초등학교 4년)와 활짝 열린 대문으로 들어섰다. 장대에 받쳐 빨랫줄에 일렬로 길게 널린 뽀얀 빨래들이 바람결에 춤을 춘다. 큰딸 수림이(중학교 1년)도 마당에서 반겨주고 잡종 개 세 마리도 컹컹 짖으며 표시를 한다. 마당에는 마늘, 파, 양파, 아욱, 부추, 머위 등 온갖 채소들이 자라고 대문 옆 은행나무 밑에서는 퇴비가 만들어지고 있다.

큰딸이 왔다갔다 하며 상 차리는 걸 돕는다. 밖에서 식사하지 말라고 말린 이유를 알겠다. 집에서 자란 싱싱한 상치며, 된장국, 머위나물, 고구마줄기나물, 밀가루 묻혀 튀긴 가자미… 나물들은 버섯, 새우, 멸치, 들깨 등 다른 재료와 섞여 고소함을 더한다. 부엌 한쪽에 딸들과 소통하는 칠판이 있어, 그가 많이 바쁜 엄마임을 비로소 상기하게 된다.

‘현관서랍장, 5월 19일 중간고사, 5월 28일 할아버지 생신…’ 등 기억해야 할 그들의 일상이 써 있다. 색 선으로 멋을 낸 ‘안녕하세요’란 글씨와 함께…. 이곳이 눈물의 결혼식을 올리고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가는 가정인가 싶게 관심과 정성이 곳곳에 배어 밝은 기운이 넘실댄다.

전화기 너머로도 보이는 눈물
‘저 사람들 언제까지 있을까?’ 교통사고로 척수장애를 입어 장기 입원 중이던 김현우 씨는 다른 환자의 보호자들을 보곤 했다. 불안했다. 중학교 때 동네교회에서 만난 첫사랑 오영자 씨와 어찌해야 할지 고통스러웠다. 고교를 졸업하고 서울과 군산, 서산 등에 헤어져 직장생활하며 애틋하게 키워온 사랑. 신체가 망가진 아픔 속에서도 자신을 간병하는 오영자 씨를 보낼 수도, 잡을 수도 없었다. 마음은 다스려지지 않았다. “보고 싶어 달려가고 싶지만 미래를 위해 참는다”던 유머 있고 스포츠를 즐기던 단단한 남자. 기계 설치 작업을 했던 그는 어릴 적부터 차를 좋아해 일찌감치 차를 장만했고 너무 피곤해 졸음운전을 하다 차량이 전복되고만 것이다.

섬유회사에 다니던 오영자 씨를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하던 사람. 그들은 가을에 결혼하기로 양가 허락을 받아놓은 사이였다.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영자 씨는 모든 것을 팽개치고 달려왔고 직장에는 사표를 냈다. 아름답다는 계절, 그 잔인한 5월에 김현우 씨는 27세, 오영자 씨는 26세였다. 그리고 7개월 동안  입ㆍ퇴원을 거듭했고,  영자 씨는 2년 여 병간호를 했다. 그 날들 어디쯤에 그들 사이에 긴장의 시기가 왔다. 영자 씨는 서울 짐을 정리하려고 떠났고, 현우 씨는 그를 가라고 마음으로 보냈다. 사랑이 그렇게 시켰고, 기약은 애초부터 없었다.

군산 집 거실에 나와 휠체어에 앉으면 현우 씨 시야에는 자꾸 대문과 담 너머가 들어왔다. 담벼락 위로 전깃줄이 6개가 걸려 있고 대문 밖으로는 논이 있고 논 건너 차들이 달린다. 세상은 통하고 있다. 그러면 은행나무와 벗하고 있는 저 대문으로 누군가 들어설 수 있지 않을까.

기약도 안 한 기다림의 허망함을 아는지 당시 함께 살던 할머니가 손자의 머리를 말없이 쓰다듬곤 하셨다.  한 달쯤 흘렀을까 현우 씨는 견디지 못해 전화기를 들었다.
“………….”  그립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를 못했다. 그러나 영자 씨는 그가 울먹였다는 것을 알았고 전화기 너머로 눈물 흘리는 그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바로 다음 날 내려왔다.

친정어머니가 안 온 눈물의 결혼식은 그 다음해에 올려졌다. 시집에서 살아야 하는 한 부부. 오영자 씨는 부부 중 누구도 돈을 벌 수 없다는 걸 알고 뛰어들었지만, 세상은 그 이상의 헌신을 요구했다. 노구의 시할머니는 훗날 폐암으로 돌아가셨고, 시어머니는 심장병, 우울증 등으로 살림은커녕, 보살펴 드려야 했다. 시아버지는 2004년 뇌출혈로 쓰러져 7개월을 입원하였지만 왼쪽이 마비되어 지체장애 2급이 되었다.

참담함 속에서도 꽃은 피었다. 그의 선한 천성과 부지런함, 그리고 결심이 양분이 되어 집안에 햇살을 끌어들였다. 인공수정으로 두 딸이 태어난 것이다. 노동은 늘어났지만 눈물을 말려주는 웃음도 늘어났다.
시아버지 대소변을 받아내고, 남편을 휠체어에 올렸다 내렸다 하느라 어깨 관절염이 도졌다. 밤이면 돌아다니는 시어머니를 감당하려고 거실에서 방문을 발로 막고 자야 하는 고단한 세월에도, 마당 밭에 온갖 야채를 키우고 꽃도 심었다. 남편과 시아버지 앞으로 나오는 정부지원금과 남편이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을 합한 160만 원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살림을 꾸려나갔다. 시어머니는 치매가 심해져 시아버지를 밀어 넘어뜨리는 바람에 올 2월 요양원에 모셨다.

“며느리가 아니라 우리 집 대주예요”
“아빠는 늦잠 자서 좋겠다”며 딸아이가 학교로 달려가며 말했다. 그 말이 남편에겐 충격이 되었다.
남편은 군산지체장애인협회에서 활동하며 수영 강사를 했다. 하지만 수영장 물에서 나올 때면 매번 무리가 되어 강사 일은 접었고, 지금은 행사 지원 등만 하고 있다. 마당 한편에 공방을 만들어 목공예를 했다. 책상도 짜고 장식품도 열심히 만들어 자립하려고 애썼다. 그것도 무리였다. 무거운 나무를 팔로만 들다보니 손목 수술을 세 번이나 해야 했다.
요즘은 교통안전공단 희망봉사단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한다. 일일이 집에서 못 나오는 장애인을 찾아가 애로 사항을 듣고 지역사회서비스를 연계시킨다. 매년 7~8개월 동안 월 30만 원의 적은 돈을 벌지만 자신을 기다리는 장애인들을 위해 호도 빵을 직접 구워 가지고 가는 등 정성을 쏟는다.

남편은 ‘기초생활수급자’라는 꼬리표를 떼고 싶다. 딸들에게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아이가 학교 가며 한 말을 곰곰이 되새긴 남편은 아내에게 함께 대학을 가자고 제안했다. 아내는 그의 말을 따랐다. 남편은 군산서해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오영자 씨는 같은 대학 호텔조리영양학과에 들어갔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해결해 나갔다. 남편은 전문대학교라서 4년제로 편입할 생각이었지만 올 1월 뜻밖에 ‘척수공동증’이란 병을 앓고 수술하는 바람에 아직 뜻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 아내는 학교에 다니며 각종 자격증을 땄다. 커피조리사, 양식조리기능사, 아동요리지도사, 한식메뉴개발사 …. 내년 1월 말에 영양사 자격증을 취득하면 취업을 할 생각이다.

큰딸 수림이는 엄마가 대학교에 다니자 원래도 착한 아이가 더 든든한 효녀가 되었다. 빨래며 할아버지 밥 차려드리기, 좌변기에 앉혀드리기 등을 맡아 하며 불평이 없다. “아빠는 다리가 아프지만 많은 일을 하세요. 다정한 아빠예요” 하더니, “엄마에겐 ‘공부’라는 취미가 생겨서 좋아요. 공부하면 되니까요…” 하며 웃는다. 영자 씨는 다 알아서 하는 딸들을 학원에 보내주고 싶다. 두 딸은 반에서 5등 안을 유지하고 있다. 현우 씨의 땀이 서려 있는 공방에 작품 ‘나무야, 나무야(신영복)’가 걸려 있다.
“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 때 세상의 모든 나무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어느 생각 깊은 나무가 말했다. 두려워 할 것 없다. 우리들이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는 법이다.”

세상이 두려워도 자루가 돼 주지 않는 든든한 가족, 그들은 일어선다. 싱싱하고 건강한 사랑으로 서로를 안아주며…. “이번 수술 때 많이 울었어요. 남편이 이토록 좋은 사람인줄 몰랐어요” 하는 영자 씨. 그가 말없이 보여주는 효심에 아이들이 물든다. 주말이면 온 가족이 시어머니를 방문하고, 눈자위를 붉히는 시아버지에게서는 “며느리가 아니라 우리 집 대주야~!”라는 말을 듣는다. 물고기 밥 주는 날을 적어 놓고 어린 물고기가 굶지 않도록 배려하는 가족. 모녀는 그날도 밥상을 치우며 빠뜨리지 않고 개 세 마리에게 줄 밥을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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