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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의학상 수상자 세계의 심장에 우뚝 서다 편집부

미국 흉부외과 의사들이 ‘정신 나간 의사’라고 혹평했으나 이젠 ‘그가 옳았다’며 최신 심장의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의사가 있다. 제4회 아산의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서울아산병원 심장병원장 박승정 울산대 교수(57)가 바로 그다.
박 교수는 심장혈관 그물망(스텐트) 시술 분야 세계 최고의 명의로, 지난 1990년대 초반 한국에서 처음으로 동맥경화증 환자에게 그물망 치료 시술을 시작한 이래 해마다 2,700여 명을 진료하는 등 서울아산병원 심장센터를 세계의 ‘심장’으로 키웠다.

지난 4월 4일, 박승정 교수는 세계 최고 권위의 학술지인 NEJM(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 4번째 논문을 게재하는 쾌거를 올렸다. 4번째 논문은 좌간동맥 주간부 스텐트 시술의 효과와 안정성에 관한 연구로 세계 심장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의과학자가 NEJM에 네 번씩이나 논문을 게재한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경이적인 기록이며, 한국 의학자로는 처음이다.
2003년에 협심증 환자를 치료하는 스텐트에 항암제를 바르면 협심증이나 심근경색증의 재발률을 크게 낮출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같은 학술지에 발표했고, 지난 2008년에는 좌주간부(Left Main)가 좁아졌을 때 스텐트 삽입술로 치료하는 것이 기존 외과 수술 못지않게 안전하다는 연구결과를 NEJM에 발표하였으며, 이 치료방법은 하나의 표준적인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세 번째 논문에서는 협심증 중재시술의 임상 치료분야에서 약물코팅 스텐트 시술 후 항혈소판제 복용 기간을 ‘1년’이라고 제시하는 등 의학사에 한 페이지를 기록하는 연구업적을 남겼다.
NEJM은 논문 인용지수가 ‘네이처’나 ‘사이언스’보다 훨씬 높은 학술지로, 최근 박 교수는 BRIC(국가 지정 생물학연구정보센터)로부터 우리나라 의생명과학자를 통틀어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저널에 가장 많은 연구논문을 게재한 의학자로 뽑히기도 했다.

수술하던 협심증, 심근경색 …  내과적 시술로 성공률 99%
“시술이란 외과의처럼 칼을 잡고 하는 게 아니라 좁아졌거나 막혀 버린 혈관에 도구를 밀어 넣어서 혈관을 확장하는 치료”라고 설명하는 박 교수에 따르면 혈관중재시술 치료법은 최근 들어 흉부외과가 아닌 심장내과의 고유 기능으로 발전해 왔다고 한다.
“제 전공 분야는 혈관에 찌꺼기가 쌓이면서 물리적으로 좁아지는 동맥경화증을 어떻게 시술로 치료하느냐 하는 겁니다. 첫 대안은 ‘풍선시술’이었죠. 32년 전인 1979년 스위스의 그룬치히 박사가 심장혈관에 풍선을 넣어 넓히는 것을 처음 시도한 게 계기가 됐습니다. 그룬치히 박사가 미국에 와서 ‘풍선시술’ 보급에 앞장섰습니다.”
그 전만 해도 심장혈관이 막히면 약물치료로 뚫어지길 기다리거나 혈관을 우회시켜 이어주는 관상동맥우회술이 전부였다. 그때부터 심혈관 치료를 놓고 내과와 외과의 갈등이 시작됐다.
그 와중에 풍선시술의 문제점이 발견됐다. 혈관을 확장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돌연사가 생기기 시작했다. 풍선의 대안으로 스텐트가 등장했다. 하지만 스텐트 시술도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풍선시술 이후 혈관이 다시 좁아지는 재협착 확률이 50%가량이었다면 스텐트 시술은 20%가량의 실패를 불렀다.
그 격랑기에 박 교수가 있었다. 그는 ‘약물코팅 스텐트 시술’이라는 대안을 들고 나왔고, 이것이 그를 세계적인 명의로 만들었다.
“항암제의 일종인 탁솔을 스텐트에다 코팅을 해서 시술을 하면 혈관 조직이 자라지 않고 안정될 것이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그런 연구에 몰입했습니다.”
이후 박 교수의 ‘약물코팅 스텐트’는 심혈관 확장 시술법의 ‘종결자’로 자리 잡았다. 현재까지 모든 통계적 결과, 협심증이나 심근경색 등 동맥경화증 치료에 있어 이 시술법을 따라가거나 넘어설 대안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가 이 시술을 시작한 건 10년 전쯤인 2002년의 일이다. 약물코팅 스텐트의 혈관 재협착 확률은 0%에 가깝다. 의학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박 교수는 그 성과를 기록한 논문을 이 분야 세계 최고 권위지인 NEJM지에 세계 처음으로 게재했던 것이다.

비난하던 美 의학계 특강 요청
2008년, 좌주간부(Left Main)가 좁아졌을 때 스텐트 삽입술로 치료하는 것이 외과 수술 못지않게 안전하다는 발표를 했을 때는 좌주간부는 시술하면 안 된다는 관념이 지배하고 있을 때여서 ‘사기꾼’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관상동맥은 세 가닥으로 나뉘는데 그 갈라지는 입구에 해당하는 부위를 좌주간부라고 한다. 오랫동안 북미나 유럽 등 선진국에서 좌주간부 질환만큼은 관상동맥우회술이라는 외과적 수술만 인정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당시 하버드 의대 오스텔리 교수는 “정신 나갔냐”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시술의 결과가 입증되면서 박 교수를 하버드 의대로 초청해 특강을 요청할 정도로 바뀌었다고 한다.
박 교수는 지난 2008년 세계 최고 권위의 미국 관상동맥중재시술(TCT)학회 설립 20주년을 맞아 ‘최고 업적상’을, 2005년에는 유럽을 대표하는 심장혈관 중재시술학계 최고 영예의 상인 ‘에티카 어워드’를 수상, 두 상을 모두 수상한 심장학자가 되었다.
TCT학회 ‘최고 업적상’은 전 세계 심장학자들이 심장학 분야의 노벨상이라고 할 만큼 영예로운 상으로, 박승정 교수가 수상한 것은 아시아 심장학자로는 처음이다. 시상식에서 심장병 치료의 세계적인 석학인 게리 민츠 박사는 “박 교수는 전 세계 심장혈관 중재시술 연구자들의 역할 모델로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1995년부터 매년 전 세계 의사 1,000여 명을 초청, 관상동맥 중재시술학회 및 국제학술회의를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심장혈관연구재단과 서울아산병원 공동 주최로 개최, 수많은 심장 전문의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전파했다. 지난 4월 17일 열린 이번 16회 국제학술회의에는 전 세계 40여 개국에서 3,500여 명이 참가해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심혈관질환 중재시술 교육의 허브를 지향하는 학회답다”는 평가를 받았다.

24시간 심장팀 운영하는 야전사령관
최고의 위치에 올랐음에도 그는 여유를 부리지 않고 오전 6시 이전에 출근해 심장중재시술을 진두지휘하며, 오후에는 환자들을 만나 진료하고 상담하는 일을 매일 같이 반복한다.
문제가 생기면 순식간에 사망할 수 있는 심장병의 특성으로 인해 항상 응급상황이 발생한다. 때문에 박 교수는 응급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24시간 상시 시술 시스템을 구축했다. “늦은 밤이라도 응급상황이 발생하면 30분 이내에 시술할 수 있도록 준비돼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다.
혈관에 찌꺼기가 모이면 ‘죽상반’이라고 하는데 이게 심혈관을 막으면 심근경색이 되고, 뇌혈관을 막으면 뇌졸중이 된다. 응급실에 오기 전에 10명 중 4명이 사망하는 게 이 질환이라고 박 교수는 말한다.
연간 2,700건 시술 가운데 심근경색 시술은 10%가량이다. 박 교수 자신의 연구실도 서울아산병원 동관 3층에 위치한 심혈관조영실 안에 있다. 그는 연구실 안에 4개의 시술실 모습을 모두 확인할 수 있는 4개의 모니터를 설치해, 응급상황에 항시 대비하는 철저함을 보여주고 있다.
분초를 다투다 보니 박 교수는 지휘관의 모습을 연상시키며, 똑 부러지며 직선적인 말투와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영락없는 군대 최고 지휘관이라고 표현되곤 한다. 실제 그는 의사, 간호사, 방사선사 등으로 구성된 심장팀을 강하게 조련한다. 응급상황에서는 사소한 실수라도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가 심장팀 소속원 모두에게 서울아산병원 인근으로 이사 오도록 지시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박 교수는 요즘 한국인의 심장질환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를 잊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20년 전만 해도 협심증이 10%밖에 안 됐지만, 식생활이 서구화되면서 현재는 돌연사의 80%~ 90%에 이를 만큼 급증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큰 문제가 될 것이 자명하죠. 미국이 이 문제를 인식하고 심장질환의 증가를 끌어 내리는데 35년이나 걸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이 심각성에 대해 관심이 전무한 실정입니다. 정부에서 나서서 심장질환의 심각성에 대해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야 합니다.”
가까이서 많은 시간을 보내 가족과 같이 느껴지는 팀원들이 중요하다는 그는 팀원들 실력이 자신보다 좋은 사람이 많다고 칭찬했다. 오랫동안 소홀했어도 잘 커준 딸들과 가족의 소중함에서 사랑을 다시 배우고 있다는 박 교수.
앞으로는 세계 최고를 유지하지 위해 고민하고 진력할 생각이라는 박 교수에게 후배에게 전할 한 마디를 부탁하자, “조금은 미련하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며 일을 즐겨야 프로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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