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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편지 올케, 정말 고마워! 손숙

올케라는 명칭은 오빠나 남동생의 아내를 일컫는 말이니까 내게 올케는 유일하다. 내 남동생은 우리 엄마에겐 외아들이고(아버지에겐 다른 아들들이 있다) 우리 집안의 종손이니까 우리에겐 그야말로 금지옥엽 귀한 아들이다.

우리 아버지와 엄마가 결혼하신 후 평생을 아버지가 엄마를 버려두고 객지로만 떠도셨기 때문에 겨우 언니와 나, 딸 둘 낳고 아들이 없어서 우리 엄마는 지은 죄도 없이 바늘방석이었다고 하셨다. 어쩌다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온 집안의 어른들까지 나서서 난리법석을 하시고 억지로 두 분을 합방시켜 그렇게 얻은 아들이 내 동생이다.  그러니 우리 엄마에게 내 동생은 어떤 아들이었겠는가. 평생 그 아들 하나 바라보시면서 한 많은 인생을 살아오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 아들은 늘 엄마에겐 아슬아슬하고 물가에 내놓은 아기 같이, 우리 엄마를 노심초사하게 했다. 착하고 여리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더 할 수 없는 효손이긴 했지만 동생의 가슴은 늘 활활 타고 있었고 지독한 역마살이 끼어서 진득하게 한 곳에 자리 잡질 못했다.

남들 쑥 들어가는 대학도 3수까지 해서 엄마를 힘들게 했고 외아들이라 안 가도 되는 군대를 가서 월남전에 자원까지 하는 바람에 우리 엄마는 몇 년을 가슴앓이를 하셨다.

군대를 다녀오더니 어느 날 덜컥 여자를 한 명 데려와서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사실 우리 집안은 여자가 시집오겠다고 하기엔 좋은 조건이 한 가지도 없었다. 종갓집 종손이라 1년에 거의 열 번 정도 제사를 지내야 했고 혼자 계시는 시어머니를 모셔야 했다. 게다가 객지에 계신 아버지랑 떨어져서 오랜 세월 그 큰살림 혼자 꾸려 오신 우리 어머니 성격도 결코 만만한 분이 아니었다. 언니와 나는 어떤 여자가 들어와서 엄마 비위 맞추고 살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동생이 데리고 온 여자는 착해 보이긴 했지만 솔직하게 소위 조건으로 따지자면 그렇게 혹할 조건도 아니어서 우리는 엄마가 어떻게 나오실지 모두 마음을 졸였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내 결혼 때는 그렇게 지독하게 반대를 하던 엄마가 선선하게 그 결혼을 승낙하셨다. 결혼을 하고도 한참 동안 나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엄마 비위 맞추면서 그 많은 제사에, 명절에, 드나드는 친인척 대접하면서 사는 일이 젊은 올케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기 때문에 한동안 친정에 가는 것이 불안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역마살이 낀 동생은 또 훌쩍 사우디로 인도네시아로 떠나서 한참 동안이나 떨어져 살고 수시로 크고 작은 일로 올케를 아프게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고부간의 갈등 같은 건 전혀 새어나오지 않았고 그 까다로운 엄마가 올케에겐 잔소리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올케 들어온 후로 집안은 훈풍이었다. 엄마는 편안해 보였고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땐 일가친척들의 올케 칭찬에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또 신기한 것은 그 아들 귀한 집안에 시집와서 딸만 셋을 낳은 올케에게 싫은 소리를 전혀 하시지 않는 것이었다. 때때로 친정에 가면 올케 안 듣는 데서 우리한테 살짝 “아들 하나만 낳으면 더 바랄게 없는데…” 하셔서 얼른 “엄마 그게 올케 마음대로 되는 일이야. 혹여라도 올케에게 그런 소리하면 안 돼” 하면, “오냐, 알았다. 너희들은 무슨 말을 못하게 하더라” 하면서 웃으셨다. 그 평화가 엄마 병환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엄마가 폐암 선고받고 1년 투병생활 하실 때 올케가 보여준 그 헌신적인 사랑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1년 동안 동생 내외는 지극 정성으로 엄마를 모셨고 그래서 우리 엄마는 아쉽지만 편안하게 운명하셨다.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늘 웃는 얼굴로 병환중의 엄마를 모셨던 올케에게 사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고맙다는 말을 못했다. 돌아가신 후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제사 때마다 그렇게 섧게 우는 올케를 보면서 나는 엄마가 며느리 복은 있으셨구나 싶어서 정말 고맙다.

엄마 돌아가신 후 동생은 또 방랑벽이 도지고 하던 일도 안 되고 마냥 사람이 좋기만 해서 이리저리 당하고 엄청 올케를 힘들게 한다. 나는 어느 날 진심으로 같은 여자 입장에서 살지 말고 헤어지라고 했더니 남편이 너무 불쌍하단다. 이 바보 같은 올케가 밉기도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참으로 고마웠다. 이제 힘없고 병까지 얻어 올케 눈치나 봐야 할 동생이 정말 밉고 또 가엾지만 그래도 마누라 복은 있어서 안심이 된다. 욕심이 있다면 나는 올케가 좀 더 깍쟁이고 생활력도 있어서 자기 잇속도 좀 챙겼으면 싶지만 그거야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닌 것 같고….

주연 엄마야….
나도 살뜰한 성격이 못 돼서 자네 볼 때도 그저 무덤덤하고 또 속도 상하니까, 평생 고맙다, 애쓴다 소리를 해본 적 없지만 속으로는 늘 고맙고 또 든든하단다. 병든 내 동생 밉고 속상하겠지만 어쩌겠니. 그것도 자네 팔자려니 하고 잘 거두어주길 바라네. 지난 번 편지에 엄청 반성하고 있더라고. 때 늦긴 했지만…. 우리 남은 여생 서로 다독거리면서 살다가 저 세상 가면 엄마 만나서 그동안 쌓인 회포도 모두 풀고 오순도순 살아보세. 멀리 있지만 서로 건강 챙기고 열심히 살자. 내 동생 버리지 않고 거두어줘서 정말 고마워.

2011년 5월 엄마 제삿날 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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