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우리시대 숨은 예인 열두 줄의 시간여행자 진옥섭

선율이 거미 꽁무니에서 줄 나오듯 그저 술술 나온다. 알아듣겠다 싶으면 이미 다른 소리를 낸다. 꼬리를 밟히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딴청부리는 가락들. 제자들 말로 아침 소리 다르고 저녁 소리 다르다하니 그야말로 무법이다. 장단이 어긋날 정도로 박을 밀거나 당기면서도 유유자적한 백인영(白寅榮)의 가야금 산조, 아슬아슬하지만 문맥은 어김없다.

산조(散調), 문자 그대로 흩어진 가락을 골라 모은 것이다. 개인의 분망한 심정이 탄지를 통해 청자의 심금을 죄고 푸는 거다. 한 길 사람 속으로 흘러들어갔을 인생사 오욕칠정이 원작이고 그날그날의 선율이 새로 나는 거다. 바로 이런 ‘허튼 가락’이 산조 본연의 모습인데, 지금은 모두 ‘OO류의 산조’로 틀에 박힌 산조를 하고 있다. 그 열외자 백인영, “오선보는 내 음악의 감옥입니다.” 그물을 지나는 물처럼 오선보를 벗어난 열두 줄의 시간여행자다.

계면조 인생
“내 삶이 그래서인지, 전 계면조가 좋아요.” 계면조(界面調), 곧바로 단조(短調)라고 치환할 수는 없지만 슬픈 기색이다. 그 기색이 완연하면 ‘진계면’이라 하는데, 백인영의 가야금 산조를 듣노라면 가야금의 울림을 “운다”로 표현해 온 저의를 알만도 하다. 현란한 탄지 속에 얼얼한 게 맺혀있는 거다.

백인영은 1945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구두를 맞춰 신을 정도로 부유한 집안의 외아들이었다. 그러나 병치레로 죽을지 살지 모르는 아이였다. 난 지 며칠 만에 가위에 어깨를 찔렸고, 그 속으로 파고든 이름 모를 균들이 병약한 아이로 만들었다. 나이 먹어도 걸을 일이 없고 그저 등에서 등으로 업혀 다니며 컸다.

아버지는 정미소를 운영했는데, 실권은 어머니에게 넘기고 여기저기 출입하는 한량이었다. 아버지의 벗들 역시 흥이 과한 이들이어서 마당 큰 백인영의 집은 언제나 소리판이었다. 굳이 광대가 아니더라도 재주 있으면 누구나 목을 뽑아 소리했다. “말하자면 조기 교육이 된 셈이죠.” 아버지는 어린 백인영이 무릎을 치며 장단을 흉내를 내자 옳다싶어 북 선생을 안겼다. 당시 전라도에서 행세를 하려면 북은 쳐야 했다. 오늘날 골프로 비즈니스를 치르듯, 기방을 출입하며 북을 치고 놀아야 큰사람 만나 큰일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명고 안기선에게 북을 배웠는데, 일취월장 소릿속을 꿰뚫었다.

그가 몰두한 것은 가야금이었다. 처음에는 사랑방을 거쳐 가는 뜨내기 율객에게 배우다 명인 장월중선을 만나면서 ‘줄 맞는 소리’를 익히기 시작했다. 산조라는 독주형식이 가야금에서 생성되어 다른 악기에 파생되었는데, 김창조에서 발원한 가야금 산조는 이미 여러 유파로 발전되어 있었다. 장월중선은 박상건류의 가야금 산조를 연주했는데, 그 바디가 음악의 첫 기둥이 되었다.

가야금에 빠져들던 중학생 시절 친모인줄 알았던 어머니가 양모임을 알았다. 아버지는 아들을 얻고자 어머니 몰래 씨앗을 보았던 것이다. 온 몸의 피가 다 새나간 것처럼 어지러웠고,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의심스러웠다. 그저 믿을 만한 것은 가야금 소리밖에 없었다. 밤이면 손에 피가 맺히게 몰두했다. 거리를 지나다가 들은 유행가가 곧바로 가야금에 올랐고, 더 애절한 단조로 슬피 울었다.

대학 시험을 치르러 서울에 올라왔다가 시험을 하루 앞두고 다시 내려갔다. 서울이라는 낯선 곳에서 지낼 일이 엄두가 안 났던 것이다. 그렇게 집과 가야금 밖에 몰랐던 그에게 유랑의 유혹이 찾아왔다. 1966년 무렵 여성국극단에서 반주를 하는 선배들이 그를 불렀다. 소도시의 극장을 전전하며 창극의 반주를 하는 것이었다. 따라나선 지 한 달 만에 반주자들이 몇 푼 더 준다는 단체로 떠나버렸다. 창극의 반주로는 아쟁이 제격인데 아쟁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할 수 없이 가야금 통에 아쟁 줄을 걸고 송진을 묻혀 해금 활대로 문질렀다. 제법 소리가 나니 이내 계면조로 긁어대며 반주를 했다. 그렇게 아쟁과 가야금을 겸하면서 남도의 소도시를 유랑하였다.

1970년 유랑을 청산하고 상경하여 요정집의 반주 악사로 나섰고, 나이트클럽의 무대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쟁과 가야금으로 “국악이면 국악, 유행가면 유행가” 자유자재로 연주했다. 실용음악인의 선두가 된 것인데, 곧바로 일본인 관광객들이 밀리면서 주머니가 두둑해졌다.

’80년대엔 방송국의 국악 프로가 활성화 되면서 KBS, MBC 등에서 국악, 쇼 프로그램 등의 반주와 녹음 등으로 집에 앉을 여가가 없었다. ’80년대 그의 악기는 전통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창작곡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아쟁으로 피아노와 협연을 시도하는가 하면, 가야금으로 현악 4중주와의 협연을 하기도 했다. 국악과 양악을 접목한 이 획기적인 공연으로 1986년에 한국일보가 선정한 ‘86년을 빛낸 음악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피아니스트 임동창과의 협연을 시작으로 산조에서 대중가요, 그리고 칸초네와 재즈까지 섭렵하면서 관객들이 즐기는 무대를 추구했다. 혹 대중가요 음반 중에서 가야금 반주가 들어있다면 십중팔구 백인영의 손길이다.

오선보 너머의 길
“돈만 보면 되는데 요놈의 소릿속이 문제란 말이요.” 1991년에는 월간 객석이 주최한 ‘가야금 여섯 바탕 전’에서 유대봉류 산조를 40여 분에 걸쳐 발표하였다. 귀명창들이 유대봉류 가야금 산조 부활의 신호탄으로 손꼽는 공연이었다. 그가 유대봉(1927~1974)을 만난 것은 ’60년대 후반이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술과 벗하며 살고 있었는데, 한 잔 술이면 송골송골한 음들이 빗방울처럼 튀었다. 그 소리에 그의 골방에 엎드려 한무릎공부를 간청했다. 유대봉의 가야금소리는 오늘날의 백인영처럼 아침 소리 다르고 저녁 소리 달랐다.

백인영의 가야금 산조는 이렇게 분망한 유대봉을 사사하며 자신의 가락을 얹은 것이다. 말하자면 유대봉제 백인영류 가야금산조인데, 수시로 조를 바꾸는 변화무쌍한 전조가 특징이다. 선율에 귀를 귀울이면 판소리에 나오는 덜렁제가 들어있고, 서울, 경기권의 억양에 비유해서 만들어진 ‘경드름’ 가락이 나오기도 하는데, 다른 유파에 비해 가장 큰 차별성은 즉흥성이 크다는 것이다.

2000년에는 ‘신동방의 소리’라는 제목으로 국립극장에서 일본, 중국의 민속음악 연주가들과 함께 즉흥연주회를 가졌다. 2002년에는 인도 음악가들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협연하였으며, 2003년 5월에는 티벳의 유명한 피리 연주자인 나왕케촉과 협연하였다. 2000년대의 작업은 이렇게 민족음악과의 만남을 시도하는 중인 것이다.

지난달, 공연을 부탁하러 방배동의 연습실을 찾았더니, “미친산조로 합시다.” 스스로 공연제목을 <미친산조>로 정했다. 남들은 가락을 정리해 또박또박 가르치며 꼬박꼬박 월사금을 받는데, 그는 흘러나오는 즉흥대로 연주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니, 자신도 주변사람들도 미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살아있음이 산조 본연의 미이기에, 부회하지만 ‘미친산조(美親散調)’란 토를 달았다. 그의 가야금에서 ‘목포의 눈물’이 울리는 가 싶더니 다시 남도 무속선율인 ‘시나위’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에게 그 소리와 그 소리는 아무런 경계가 없었다. 오로지 오선보 너머의 길 없는 길을 탐닉하면서, ‘심금을 울리는’ 음악에 몰두하는 것이다.

이미지 하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