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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에 핀 꽃 눈 속의 매화 이종묵

온 산천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 함초롬히 망울을 터트리는 꽃을 구경한다는 것은  고상한 일이다. 당나라 정곡(鄭谷)이라는 시인은 “앞마을 깊은 눈 속에, 한 가지 매화가 간밤에 피었네(前村深雪裏, 昨夜數枝開)”라는 명구를 남겼지만 이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야생의 매화는 3월이 되어야 핀다. 조선 선비들은 화분에 매화를 키워 한겨울 눈 속에 즐겼다.
화분에 매화를 키우는 법은 <양화소록(養花小錄)>에 자세하다. 조그마한 복숭아나무를 화분에 먼저 심어 뿌리를 내리게 한 다음, 매화나무 가지 곁에 걸어 매달아서 가지가 서로 교차되도록 한다. 서로 맞닿은 부분의 껍질을 벗겨낸 후 살아 있는 칡덩굴의 껍질로 단단히 잡아매고 매화나무는 가지만 베어낸다. 그런 후 반쯤 볕이 들고 반쯤 응달이 되는 곳에 두고 물을 자주 주면 붙어 있던 나무가 옆으로 비스듬하게 누워 기굴한 모습을 띤다. 꽃봉오리가 맺히면 따뜻한 방안으로 들여 놓고 자주 미지근한 물을 뿌리에 뿜어 주고 옆에 뜨거운 화로를 놓아 두어 찬 공기를 쐬지 않게 한다. 그러면 동지가 되기 전에 꽃봉오리가 터진다.

눈 속의 매화를 꽃 피우게 하는 일이 쉬울 것 같지만 실제는 그러하지 않았다. 매화의 고상한 멋을 즐기고자 하는 선비는 많았지만 화분에 심어둔 매화는 쉽게 눈 속에 꽃을 피우지 못하였다. 그래서 화가 김홍도는 자신의 그림을 30냥에 팔아 매화 화분 하나를 구입하는 데 20냥을 썼다. 당시 30냥이면 초가삼간을 한 채 살 수 있었다. 이런 귀한 눈 속에 꽃을 피운 매화 화분을 보게 되면 그냥 넘어갈 수 없었으리라. 흥을 아는 선비라면 벗을 불러 술을 마시면서 꽃을 감상하는 매화음(梅花飮)을 열었다. 김홍도도 매화를 사고 남은 10냥에서 8냥은 매화음에 쓰고 나머지 두 냥을 가지고 며칠 가족을 위한 양식과 땔감을 구하였다.

벗과 어울려 매화를 보면서 한바탕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청복(淸福)이겠지만, 선비의 마음을 닮은 고고한 매화는 홀로 호젓하게 보는 것이 더 운치 있는 일이다. 

그믐 되자 매화꽃이 사람을 보고 웃기에
등불 아래 온 마음으로 가까이 한다네.
찬 서재서 눈 녹인 물로 차를 끓여 마시는 맛
금을 새긴 비단 휘장에서 봄인들 이를 당하랴?
近臘梅花向人 盡情燈火共相親
寒齋雪水烹茶興 何似銷金帳裏春
   - 신정, <홀로 있는 밤(獨夜)>

신정(申晸)은 홀로 서재에 있다가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린 것을 보았다. 굳이 벗을 불러 술을 마시면서 떠들 것이 있겠는가? 눈 녹인 물로 차를 끓여 마시면서 은은한 등불 아래 매화를 감상하면 대궐 같은 좋은 집 비단 휘장 아래 아름다운 여인을 끼고 노는 것보다 더욱 멋이 있는 일이다. 이덕무(李德懋)가 세상에서 가장 운치 있는 풍경 중의 하나로 “오른편에는 일제히 꽃봉오리를 터뜨린 매화가 보이고 왼편에는 솔바람과 회화나무에 듣는 빗소리처럼 보글보글 차 끓는 소리가 들린다”라 한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예전에는 꽃이 피는 것을 꽃이 웃는다고 하였다. 매화가 사람과 마음이 통하였기에 빙그레 웃음을 보낸 것이다. 빼어난 운치와 높은 격조를 자랑하는 매화는 선비의 상징이다. 그래서 매화는 벼슬을 하지 않는 처사(處士)에 비유하고 오상고절을 자랑하는 국화는 숨어사는 은자에 비유한다. 호젓한 삶을 지향하는 선비에게 매화만이 그 맑은 마음을 함께 하는 벗이 될 수 있다.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지만 시 하나로 일세를 울린 이광려(李匡呂)는 매화와 하나가 되었다. 

창 가득 그림자가 긴 댓가지에 어른어른
한 밤에 남쪽 누각에는 달이 막 돋았네.
이내 몸이 향기에 완전히 동화가 되었나보다
매화에 코를 갖다 대어도 감감 무소식이니. 
滿戶影交脩竹枝  夜分南閣月生時
此身定與香全化  嗅逼梅花寂不知
   - 광려, <매화(梅)>

매화 하나만으로도 운치가 있는데 늘 푸른 대나무가 곁들였고 달까지 돋았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선비는 절로 매화가 되었다. 매처학자(梅妻鶴子)라는 말을 만들어낸 송나라의 임포(林逋)가 “찰랑찰랑 물 위에 성긴 그림자 비껴 흐르고, 어렴풋한 달빛 속에 그윽한 향기는 풍겨서 오네(疏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라고 한 천하의 명구에 짝할 만하다고 평가된 작품이다.

삭막한 겨울 꽃을 피운 매화 화분 하나 들여놓고 그윽한 향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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