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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그대가 되어 “가난한 자를 최고로 대접하라!” 이인영

“오늘은 귀여운 우리 아기와 아내가 퇴원하는 날입니다. 돈이 없어서 안타깝던 그때, 도티기념병원에서는 의료보험증이 없어도 외국인이어도 괜찮다고 하면서 뜨거운 손길을 내밀어주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힘없는 외국인 유학생이지만 꼭 보답하고 싶습니다.”

“암을 알고도 병원에 가지 못했습니다. 열심히 살았는데도 병원 갈 돈이 없으니까 죽고 싶었습니다. 설마 했는데, 잊지 못할 겁니다. 사랑합니다.”

퇴원할 때면 환자나 보호자가 감사의 글을 남기거나 고맙고 미안해서 눈물을 흘리는 자선병원이 있다. 은평구 응암동 백련산 자락에 자리한 ‘도티기념병원’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병원에 갈 엄두를 못 내다가 소문을 듣고 마지막으로 찾는 병원, 환자가 긴장한 표정으로 왔다가 위로를 받으며 희망을 품고 돌아가는 곳이다.

도티기념병원은 수술, 입원비까지 모두 무료다. 외국인노동자도 오고, 제주도에서도 찾아온다. 그동안 197만 명이 진료를 받았고, 3만 7000 명이 수술을 받았다.

“저희도 훌륭한 의사가 되어 도울게요”
“엄마 아기 잘 낳아~!” 제1수술실로 엄마를 들여보낸 초등학교 1학년 아이는 수술실 문 앞을 떠나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른다. 동생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산모의 남편은 미안한 듯 말이 없다. 첫째를 제왕절개로 낳았기에 둘째 낳는 일에 걱정이 많았던 가난한 아빠. 상기된 얼굴로 서성댄다.

안에서는 분주한 작업이 시작된다. 권글라라 책임수녀는 언제나처럼 기도를 먼저 드린다. 20년의 세월 빠짐없이 한밤이고 낮이고 수술실을 지켜온 수녀. 제2산부인과의 박대원 과장을 비롯한 의료진은 각자의 위치에서 아무 말이 없다. 긴장감이 돈다. 왜 빨리 우렁차게 우는 소리가 안 들리는 걸까? 난생처음 수술 장면을 멀리서나마 목도하며 수술이 무사히 잘 끝나기를 기도하게 된다.

12분쯤 흘렀나. 드디어 의사가 아이를 들어올렸다! 새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 지구에 한국에 도티기념병원에 애타게 기다리는 누나와 부모에게로 아기가 오는 순간이다.

아기는 간호사 손으로 넘겨졌는데 ‘앙’하고 작은 소리로 한 번 울더니 더 이상 울지 않는다. ‘크게 울렴, 크게~!’하는 바람에 목울대가 울릴 것만 같다. 간호사의 손길이 바쁘다. 아기가 먹은 이물질을 뽑아내는 일들이 숨가쁘게 진행되고 가슴이 졸여진다. 아기가 드디어 맘껏 운다. 콧날이 오뚝한 남자 아기. 보통 절개해서 아기를 꺼낼 때까지 5분에서 10분 걸리는데 산모의 자궁 복벽 유착이 심해 힘들었던 수술이었다.

“내가 업어 키울 거예요.” 누나가 웃는다. 아빠도 웃는다. 축하와 감사가 있는 세상이 펼쳐지고 세상이 온통 축복으로 변한다.
수녀들은 숱한 아기의 생명을 살렸다. 마리아수녀회는 1980년대 말부터 ‘생명수호운동’을 전개했다. 낙태 비디오 등을 제작해 산부인과병원을 전전하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저희도 과장님처럼 훌륭한 의사가 될 테니까 조금만 참아주세요!” 대학생 쌍둥이 자매가 자신들을 받아준 제1산부인과 서상준 과장을 찾아와 말했다. 수녀의 설득으로 엄마가 마음을 돌려 이 세상에 오게 된 아가씨들이다. 둘 다 일류대 의학대학원에 지원한다며 자기소개서 작성에 관해 상담을 하고 갔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어린이는 형편이 어려웠지만 아버지 위암 수술을 해드릴 수 있었던 일로 큰 위안을 받아 훗날 신부가 되었다. 아버지 위암 수술 한번 해드렸으면 하고 소원했던 일이 이루어지자 “아, 가톨릭이 이런 곳이구나!” 생각하고 사제가 되었다고 한다. 신부는 지금도 신자들과 함께 와 이곳을 돕는다.

빈자들의 수호자 ‘알로이시오 몬시뇰’
1957년 선교사로 한국에 온 미국인 알로이시오 슈월츠 몬시뇰(Msgr. Aloysius Scwartz ; 1930~1992)은  부산교구 소속 사제로 1964년 ‘마리아수녀회’를 창설했다. 한국 전쟁 고아들의 어머니 역할과 행려자 등 소외된 사람들에게 봉사를 하기 위한 수도회를 창설한 것이다 .

도티기념병원은 몬시뇰의 자선사업을 후원해온 은인 골드만삭스 전 중역 조지 도티(George E. Doty・91) 씨 부부의 재정 후원을 받아 1982년 설립된 병원으로, “가난한 사람을 환영하고 우대한다”는 설립 취지에 따라 마리아수녀회에서 28년째 운영하고 있다. 연간 30억 원이 넘는 운영비는 기업 및 개인 후원금과 박애주의자 의사였던 선친을 기리는 도티 씨 가족 후원금으로 충당한다.

1970년대 소년의집과 부랑인 보호시설 은평의마을(전 갱생원)에 환자가 생기면 수녀들은 치료를 부탁하며 다녔다. 일반병원에서 꺼려했기 때문이다. 고통도 호소하지 못하고 몇 시간이고 기다리다 다음날 오라는 푸대접을 받기도 하며 인간의 존엄성에 상처를 받았다.  병들고, 잊혀지고, 외면당하며, 귀찮은 존재로 떠돌던 이들과  다리 밑, 대합실, 거리 뒷골목 구석에 버려져 울고 있던 아이들을 위해 따뜻한 병원이 꼭 필요했다.

“2,500명 소년의집 아동과 갱생원 1,800명 원생의 건강관리를 담당하고, 영세민에게도 무료 의료혜택을 제공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어려움을 겪는 환자들을 치료해 정상적인 생활을 하도록 도와주기 위해서이다” 라고 설립 목적을 밝힌 몬시뇰은 ‘가난한 환자가 환영받는 병원, 최고의 의료진을 갖춘 가장 좋은 병원’을 만들자고 다짐했다. 몬시뇰은 “가난한 환자를 최고로 대접하라”는 주문을 하곤 했다.

마리아수녀회는 시립꿈나무마을(전 시립소년의집), 은평의마을, 알로이시오 중・고등학교, 평화로운집 등 국내외 27개 시설을 운영하고 있으며, 수녀들은 세상에서 낮은 자로 살아가며 묵묵히 소임을 다해오고 있다.

가난하고 힘없는 환자를 환영하는 병원
“진짜 가난한 사람, 힘없고 고통 받는 환자들을 환영하는 병원입니다. 수녀는 그런 사람들의 종입니다. 이 작은 병원에서 그동안 53개국의 외국인 환자들이 건강을 회복하고 삶의 희망을 찾은 것은 놀라운 사실이지요.” 병원장 김옥순 수녀의 말이다.
도티기념병원에는 산부인과, 소아과, 내과, 외과 등 7개 과에 7명의 의사,  간호사, 약사, 수녀 등 70여 명이 함께 근무하고 있다. 상근 의사는 대부분 서울대 의대를 나온 선・후배들이다. 의술이 좋은 의사를 영입하기 위해 원장 수녀 등은 삼고초려를 했다. 종합병원에 근무하는 의사를 만나기 위해 몇 시간이고 기다리고, 밤이고 공휴일이고 집요하게 연락을 취하며 아이들과 함께 가난한 이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도와달라고 억지를 부렸다.

의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시간이 어찌 흘렀는지 잊었다”고 말했다. 부모형제 모두가 의사인 소아과 이창효 과장 부모님은 “일시적인 경험은 좋지만, 밖에서 돕는 방법도 있다” 며 안타까워하시곤 했다. “1년쯤 지나니까 너무 힘들어 그만둘까 생각도 했지만 어려운 환자가 많아 손 떼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자 정들었고 28년이 흘렀습니다”라고 말했다.

을지병원에 근무하다 온 외과 이영일 과장은 “환자가 완치되어 나갈 때 보람이 있습니다. 놀라운 일은 시간이 어찌 지났는지 잊어버렸다는 겁니다” 라고 말했다.

서울대병원을 은퇴하고 이곳에서 정형외과를 맡은 김진호 과장도 병원 설립 초기부터 주말과 공휴일에 의료 자원봉사를 해왔다. 처음에 계속 도움을 청하는 수녀를 보고 ‘이상한 수녀님 다 보네’ 하고 생각했지만 이 길을 함께 가기로 한 김 과장은 걸핏하면 다치는 아이들을 아버지의 손길로 치료했다.

의사들은 “아버지가 없으면 제 시간에 도움을 못 받습니다. 아버지 역할을 하고 계신데 가실 수 없습니다” 하는 수녀의 말에 떠나지 못했다. 박카스 몇 병을 손에 쥐어주며 눈물 흘리는 환자의 애환을 지켜보며 설립자의 정신에 따라 가난한 자의 보호자로 인술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간호사들 역시 전천후 간호사가 되어 아들, 딸과 연락이 끊어진 행려 환자 곁에서 간병을 해왔다.

“의사는 특별한 소명으로 부름을 받은 것 같아요.” 김옥순 병원장 수녀가 말했다.
매일 기적이 일어나는 곳. 폐렴 중에도 해외에 나가 후원자를 만나고, 정작 자신은 평생 구두를 꿰매어 신었던 아름다운 사제 알로이시오 슈월츠 몬시뇰. 그가 설립한 마리아수녀회 딸들과 도티기념병원이 그곳에 있다. 낙태하려고 병원을 찾았던 임산부들은 새 생명이 탄생하는 기쁨을 맛보고, 남루했던 부랑인은 꺼져가는 생명의 마지막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고맙다는 말을 남기며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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