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다시 일터로 봄, 길 위의 사람들 김진미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
다시, 참 좋은 말이다. 요즘 들어 부쩍 파릇파릇해지는 새싹들을 보면 어김없이 동토를 녹이고야 마는 봄의 기운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뭐든 다시 시작된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든든한 일인가.
특히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다시’라는 말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노숙인들이 그렇다. 그들에게 ‘다시’라는 건 우리가 살아가면서 실패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한다는 뜻이고, 무엇보다 새로운 기회를 꿈꿀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일하는 곳도 그렇게 ‘다시’를 꿈꾸는 곳이다.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

실패할 수 있다. 그러므로 꿈꿀 수 있다
봄이 오기 전, 우리가 매일매일 한 일은 거리에서 노숙하는 분들을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었다. 영하의 날씨에 낡은 이불이나 종이상자 몇 개로 냉기를 털어내고 견딘다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거니와 위험하기도 하기 때문에, 대화 내용은 주로 ‘쉼터’에 가서 생활하면 좋겠다는 간곡한 설득이다. 물론 많은 분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거절한다. ‘쉼터’에 입소하면 정말 노숙자로 낙인찍히는 것 같아 싫다고도 하고, 단체 생활하는 데 적응하기 어렵다는 분들도 있다.
지난 겨울, 시청역에서 만난 박씨 아저씨는 1997년 이후 5년 동안 노숙을 한 경력을 갖고 있다. 박씨 아저씨는 뺑소니 자동차 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를 쓰기 힘들다. 연세도 많고 건강도 썩 좋지는 않으니 쉼터에 입소하여 도움을 받으면 좋지 않겠느냐고 진심으로 권해도 늘 고개를 흔드셨다. 나라에서 도움을 받는 것은 싫다고 하면서…. 그렇다고 박씨 아저씨가 일하지 않고 방탕하게 생활하는 것은 아니다. 아저씨는 낮에는 주로 남대문시장의 한 가게에서 쓰레기 분리 수거를 한다. 그곳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얼마간 돈을 받는데, 장사가 잘 되는 날에는 4만 원까지 수입이 생긴다고 좋아한다. 부지런한 아저씨는 오늘도 아픈 다리를 이끌고 여기저기 일거리를 찾으러 다니신다.
서울 지역의 지하도나 역사, 공원 같은 곳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은 대략 300명에서 500명 정도. 지금은 많은 분들이 쉼터에 입소해서 다시 살아 보려 노력하고 있지만, IMF 경제 위기가 심각할 때에는 1,0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서울역 지하도에 밀집해 노숙을 할 정도였다.
사실 노숙인들의 사연은 그 수만큼이나 각양각색, 천인천색이다. 일반 시민들은 대충 IMF 때 실직을 했거나 운영하던 가게나 사업체가 망해서 노숙을 하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밑바닥 인생을 살다가 가지고 있는 노동 능력으로는 이 사회에서 발 붙일 곳이 없어 노숙을 하는 경우, 식당이나 건축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떠돌다가 그나마 일거리가 없어지면서 살아갈 곳도 없어진 경우, 개인적으로 충격적인 사건이 생겨 희망을 버리고 가출한 경우, 가족 관계가 나빠지면서 집에서 지낼 수 없게 된 경우, 알코올 중독이나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데 가족들이 받아 주질 않거나 도와 줄 형편이 되지 않는 경우 등 참으로 갖가지 이유들이 있다. 굳이 공통점을 찾으라면 어려움에 빠졌을 때 가까이에 도와 주거나 따뜻하게 맞아줄 사람이 없었고, 오래 전부터 가난하고 불우하게 살았던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붕어빵 사장님의 봄맞이
살아가는 일이 만만치 않은 만큼 노숙에 처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빠졌던 분들이 다시 일어서겠다는 마음을 먹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더구나 이 엄혹한 경쟁 사회에서 실제로 재기에 성공하는 것이야 어찌 만만한 일이겠는가. 하지만 많은 분들이 또한 그런 어려움을 딛고 희망을 만들어 가고 있다.
IMF 때 전 재산을 잃고 방황하다가 쉼터에 입소해서는 아파트 경비직을 얻어 왕복 4시간의 고된 길을 마다하지 않고 기쁘게 출근하는 어떤 분은 그 와중에도 경비를 그만둔 뒤를 대비해 열쇠 복사, 구두 수선 일을 배우고 있다. 아내와 이혼하고 집을 나와서 오래 방황을 하던 분은 그 괴로움 때문에 멀리 했던 일을 찾아 설렁탕집에 취직을 하고, 이제 작은 식당을 가져 보겠다고 희망에 부풀어 있다.
하던 사업체가 부도가 나서 몇 년간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던 한 분은 쉼터에서 동절기 자활 사업으로 시작한 붕어빵을 팔려고 지난 겨울 찬 바람 부는 거리에 다시 나섰다. 한동안 ‘그래도 내가 기업체를 운영하던 사람인데’ 하는 생각에 모자를 눌러쓰게 되더라는 그분은 이제 단골 손님 많은 붕어빵 판매 사장님이고, 새봄부터는 뭘 팔면 좋을까 궁리하는 예비 벤처 사장님이다. 그 붕어빵 사장님은 집을 나와 헤매며 을지로 지하도에서 잠을 잘 때 말 없이 컵라면을 사주던 분, 그리고 다시 출발하기까지 도와준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고백한다.

역전 드라마를 기다리며
아직 거리에는 다시 시작할 용기가, 혹은 의욕이, 어쩌면 형편이 안 되어 새로 찾아온 봄날을 맞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더 가까이 가려고 어두운 밤거리에서 상담을 마다하지 않는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있다. 노숙을 접고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역전 드라마를 그런 노숙인들과 나누고 싶다. 아니 어찌 거리에 있는 분들뿐이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 복판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설레임이고 희망이지 않을까.

이미지 하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