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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배움터에서 늦깎이의 여고시절 첫째 날 김지은

“선서!”
“나는 학업에 정진하여 학력 정진에 힘쓸 것이며, 나의 목표를 향하여 끝없이 노력할 것을 다짐합니다.”
지난 3월 5일 오후 2시. 부산시 금정구 회동동에 위치한 예원여중 강당에서는 특별한 입학식이 열렸다. 여자 중학교 입학식 하면 으레 14살 앳된 소녀들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겠지만,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들은 중학생 딸이나 손녀를 두었음직한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들이다.
 

어머니들의 입학식
부산 예원여자중학교와 예원여자정보고등학교는 개인적·사회적 여건으로 인하여 젊은 시절 학업의 기회를 잃어버린 어머니들에게 뒤늦게나마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특별 학급을 운영하고 있다.그 동안 산업화 과정에서 학교 대신 가정이나 산업 현장에서 열심히 일했던 우리의 어머니들. 이제는 겨우 안정된 삶을 꾸려가고 있지만 항상 배우지 못한 이유 때문에 개인적 외로움과 사회적 소외를 당해 왔다. 어머니들의 이러한 입장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늦게나마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여 학업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해 주고, 나아가 상급학교 진학의 기회까지도 마련해 주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학교의 설립 취지인 것이다. 이러한 취지 아래 올해로 벌써 중학교는 제 4회째(입학생 185명), 고등학교는 제 2회째(입학생 190명)의 입학식을 맞게 되었다.

뜨거운 향학열
입학식에 참석한 어머니들 가운데 유난히 고운 백발이 눈에 띄는 이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여쭈어 보니 올해 2월 예원여중을 졸업하고, 같은 학교 고등학교 과정에 입학하는 이복전(부산시 안락동) 할머니다. 할머니의 연세는 올해 76세로, 입학생 중 최고령자라고 한다.
몇 년 전 우연히 예원여중에 관한 신문 기사를 읽게 된 할머니는 그 길로 당장 학교로 연락하여 입학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입학 시기를 놓쳐서 그 해에는 입학을 할 수 없었고, 다시 일 년을 기다려 다음 해에 중학교 과정에 입학을 하였다. 입학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마냥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운전 면허를 취득하는 등 자투리 시간을 아주 알차게 활용했다.
처음에 할머니가 입학 의사를 밝혔을 땐 자녀들이 만류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냥 절이나 다니시면서 편하게 지내시지 무엇 때문에 힘들게 다시 공부를 시작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배움에 대한 열정은 확고부동했다.
“나는 내 인생의 황혼기를 배우면서 보내고 싶어요. 배우는 것 자체가 아름답고 보람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특히 나는 불교 신자이기 때문에 윤회(輪回) 사상을 믿습니다. 금생(今生)에 공부를 많이 하면 내생(來生)에 편하리라고 봐요.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는 공부는 내생에 할 공부를 미리 하고 있는 거지요.”
배움에 대한 의지가 확고했던 만큼 할머니는 중학교 과정을 마치는 동안 한 번도 결석이나 지각을 하신 적이 없단다. 물론 숙제도 한번도 거르지 않으셨다고 한다. 연세가 있으시니 행여 아파서 결석하신 적은 없냐고 여쭈니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하는데 병 날 게 뭐가 있어.” 하고 대답하신다. 잠시 후 기자가 무심코 지나가는 말로 혹시 대학까지 진학할 생각이 있으시냐고 묻자, 뜻밖에도 할머니는 자신의 건강이 허락되는 한 대학 공부까지 하겠다고 하여 질문한 기자를 당황하게 했다. 그냥 막연히 대학에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목표도 아주 명확했다. 경주에 있는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진학하여 불교에 대해 깊이 공부해 보고 싶다는 것이다.
이복전 할머니뿐만 아니라 이 학교에 입학한 어머니들은 늦게 학업에 임하는 만큼 그 열정과 각오가 대단히 진지해서 선생님들이 수업 시간에 교과 내용 외에 다른 것을 언급하기가 무색할 정도라고 한다. 또한 어머니들은 학교의 소재지인 금정구 관내에 있는 여러 사회 복지 단체에 김치 담가주기 등 다양한 형태의 봉사활동을 나감으로써 자신들이 받는 혜택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빛나는 졸업장을 그대 품안에
입학식을 끝낸 어머니들의 얼굴에는 처음의 긴장된 표정 대신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가정에서 아내와 어머니, 며느리의 역할을 원만하게 하면서 학업까지 충실히 해 나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오늘 입학식에 참석한 어머니들 모두 2년 후에 그야말로 ‘빛나는 졸업장’을 받게 되리란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혹시라도 힘들고 지쳐서 그만 학업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에는 이 말을 떠올려 보자. 이복전 할머니의 담임 선생님이신 소필숙 선생님(고1-1)께서 하신 말이다.
“나무가 썩으면 그냥 숯가루밖에 안 되지만 땅 속 깊은 곳에서 높은 열과 압력을 견뎌내면 보석 중의 보석 다이아몬드가 됩니다. 마주한 현실에 지쳐서 힘들 때, 그것이 바로 나를 단련시키는 ‘열’과 ‘압력’이라고 생각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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