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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얼굴 판자촌의 대모 강명순 이인영

‘부스러기 사랑나눔회’에서 만난 우리는 안산 시립 어린이 청소년 쉼터며, 국내 최초의 아동 무료 급식소인 ‘신나는 집’을 향해 강명순 목사(여, 50세) 두 딸과 함께 승합차를 탔다. 그녀가 차 안에서 구두를 벗고 건너편에 앉은 딸의 코트 속으로 피곤한 발을 들이밀었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 살그머니 구두를 벗고 따라해 본다. 웃음이 난다. 우리가 처음 만난 사람인가?
그날 안개가 끼여 연회색이었고 난로를 켰을 때 빨간 불빛이 어울렸고…. 그런 이유도 있지만 대화의 서두를 장식한 그녀의 아버지가 내 맘에 들어와서 나 스스로 친해졌다.

멋쟁이 아버지
‘죽순회’. 어릴 때 형제 자매들 모임 이름이다.
1960년대. 강명순 목사의 아버지가 8남매를 모아 모임을 만들고 회장도 뽑았다. 토론 주제도 있었고, 요망사항 난도 있었다. ‘아를의 여인’이란 음악이 집에 늘 흘렀고, ‘베사메무초’가 나올 때는 며느리, 아버지, 할머니가 모두 춤을 추었다. 니콘 카메라가 있었고, 어머니는 문학 소녀 스타일이었다. 상상만으로도 재미가 있다.
일제시대 철도원이셨던 아버지. 매일 새벽 4시 반이면 자녀들을 깨워 대나무 숲을 지나 3시간이나 등산을 하게 하셨다. 그곳이 부산의 구덕산이다. 강명순 목사의 에너지 원천은 그 속에 있었다.
아름다운 음악, 새벽의 산, 민주적인 토론, 순간을 보는 카메라,  늘 새롭게 시도해 보는 창의력. 아버지는 어릴 적에 자갈 넣고 숯을 넣은 커다란 정수기를 집에 턱하니 만들어 놓으셨다. 가족을 위하여…. 그 멋쟁이 아버지가 어느 날 쓰러지셨다.

호롱을 켜려무나. 뿌옇게 몰려오는 소나기를 가득 담고
어둠 속을 흐르는, 네 눈을 켜려무나. 하늘에 실노을이
서행(西行)하고 어른거리는 불빛은 꽃을 쫓는다.
닦아도 닦아도 흐르는 꽃 술 같은 네 강물.
갈꽃은 붉게 붉게 익어가는데, 아이야 네 눈 가득 아비가 젖어 있구나.
- 기형도의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중에서

수학여행 갈래? 안경 살래?
“대학 다닐 때부터 빈민들에게 관심이 갔어요. 창동으로 봉사를 나갔지요.”
그녀가 어려운 사람들을 이해하게 된 것은 아버지가 간경화로 쓰러지신 다음이다. 부도를 맞아 살던 100평짜리 집에서 10평 슬레이트 집으로 이사갔을 때에도 집에는 활력이 있었다. 아버진 아주 조금씩 땅을 사서 향나무, 국화, 장미 등 꺾꽂이를 하셨다. 그렇게 해서 나무를 100~200 그루로 늘려갔으며, 아이들에겐 담당 구역과 나무들을 정해 주고 책임하에 관리하게 하셨다.
당번제로 물을 주게도 하고, 아이들은 가지, 오이, 배추, 무 등의 농사에 참여하고, 양을 키우고 그 우유를 마셨다. 닭도 키웠다. 그 때의 아버지의 교육에 힘입어 그녀는 지금도 밥 잘하는 여자로 남아 있다.
“수학여행 갈래? 안경 살래?” 눈이 나빠진 그녀에게 어느 날 물으셨다.
안경을 선택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아버지 가슴이 몹시 아팠을 거란 생각이 든다. 결국 중학교 때 돌아가시고 공납금을 제때 못내는 처지가 되었다.
어느날 공납금을 못낸 아이들이 모두 서무실에 모였다. 그리고 언제까지 내겠다고 약속하지 못한 아이들 서넛은 하루 종일 서무실 자재 창구에 갇혀 있게 되었다. 그 때의 아픔과 참담했던 그 기억. 약속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비참함. 자꾸 떠오르던 돌아가신 아버지…. 그녀는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어려움이 정말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사랑의 부스러기
“나 내일 입학식이에요.”
“…목이 아파요.” 
안산 ‘신나는 집’ 아이들은 그녀를 보고 엄마라고 부르며 매달린다. 저녁 시간. 대부분 아이들은 TV에 빠져 있고, 개중엔 피아노 치는 소녀, 책 읽는 아이에, 괜시리 그녀 주변을 맴맴 도는 아이도 있다.
부모의 실직, 불화, 가출 등으로 가정이 결손되어 방치된 아이들, 아무도 돌봐 주는 사람이 없는 아동들과 청소년들이 밥도 먹고 공부도 하고 쓸쓸함도 달랜다. 아직도 우리 주변엔 소원을 빌라면 ‘배고픔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하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다.
그녀가 빈민들을 돕고자 부스러기 선교회를 시작한 건 1986년 12월이다. 어려운 사람들의 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데 큰 단체나 교회에서는 눈을 주지 못했다.
가슴이 아팠던 그녀는 가장 먼저 떠올랐던 모교 친구나 교수들에게 도와줄 것을 청했다. 돈이 부정기적이나마 조금씩 모이고 쌀과 연탄부터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도와달라고 주문이 왔다. 감당할 수는 없고 눈 감을 수도 없고 해서 미궁에 빠졌던 그녀가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천원 구좌’. 우체국에 천원 후원금 구좌를 개설하고 그야말로 사랑의 부스러기를 모았다.
사랑의 부스러기. 사랑이 진짜이고 크다면 그 부스러기만으로도 우리는 기쁘게 살 수 있다. 진짜 큰 사랑이란 남아도는 찌끄러기가 아니라 모자란 가운데 가난한 마음을 나눠주는 것이다.
계속 성장한 부스러기 선교회(현, 부스러기 사랑나눔회) 산하에는 현재 전국에 ‘신나는 집’이 29개, 농촌을 중심으로 공부방이 17개, 놀이방이 1개 있고, 성적으로 학대를 받은 13세 이하의 여자 아동을 보호하는 ‘로뎀나무의 집’, 매맞는 아이들을 장기적으로 교육하고 책임지는 ‘민들레의 쉼터’가 있다. 그녀는 그외에도 한글을 가르쳐 주던 빈민여성교육선교원(현, 예은사랑나눔회) 원장도 역임했다. 과연 종교인 국민훈장, 올해의 여성상, 평등부부상 등을 수상할 만하다.

신나는 조합
하나를 해결하면 저절로 다른 문제가 보였다. 근원적인 것을 도와야 한다는 것. 빵만으론 부족하다. 공부방이 있었으면…. 학업을 계속하려면 학비가 필요하다. 장학금을 주었으면…. 부모가 자립할 수가 없어 가정이 성립될 수 없다. 풀빵 장사라도 할 밑천이 필요하다. 얼마라도 무보증으로…. 조합이 필요하다. 바로 ‘신나는 조합’ 같은….
‘신나는 조합’은 자활 의지를 북돋는 무보증 소액 대출 프로그램이다. 방글라데시의 경제학자 모하메드 유누스가 1976년 세운 그라민 은행(빈민에게만 대출하는 은행)의 한국 지부 격인데, 적임자였던 그녀가 맡게 된 것이다. 후원은 씨티은행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대상으로 100만원 이하의 소액대부제를 통해 하는데, 경제 정도, 학력, 생각이 비슷한  5명이 모여 서로 보증하며 사전 교육도 받는다. 두 명이면 도망가기 쉽고, 셋이면 한 명이 왕따 당하고, 넷이면 둘씩 갈라져 다섯 명이 좋다는 것. 대부받은 사람은 혼자 하든 함께 하든 자영업을 하게 되며, 최소한 일주일에 1,000원을 의무적으로 저금하게 되어 있다.
서로 힘도 북돋아주며, 저금하는 습관도 훈련하게 되는 셈이다. 방글라데시 하면 몹시 가난한 나라라는 생각만 드는데 그곳에 그런 멋진 사람이 있었다니, 우리의 경우 그런 사람 10명은 나오고도 남겠다는 생각이 든다.

희망이란 나무
대학교 다닐 때부터 빈민촌에서 자원 봉사를 하던 강 목사는 1974년 이화여자대학을 졸업한 후 사당동 판자촌에 들어간 이래 한번도 가난한 사람들을 떠나지 않았다. 장장 29년 동안. 사랑은 결코 떠나려 하지 않는 것인가 보다.
남편도 교회 학생회에서 초등학교로 교생 실습 봉사를 갔을 때 만났다. 감리교 신학생이던 정명기 목사(안산 제일감리교회)의 순수한 열정과 공감하는 하나의 가치관에 이끌려 한 배를 타고 험한 세상으로 뛰어들었다.
신혼 시절, 이들 부부의 모습은 가난한 연인, 바로 그것이었다. 사당 3동에 차린 신혼 살림은 말할 수 없이 궁핍했다. 비좁은 산동네에 살다 보니 비만 와도 길이 패인다. 또 살림집은 지대가 높아 물도 없고, 화장실도 공동 화장실뿐이었다. 김장을 담글라치면 차들이 지나 다니는 공동 수돗가에서 부끄러워하며 언 손을 호호 불며 담가 날랐다. 그래도 남편만 있으면 든든했는데 그 신랑이 신혼 6개월 때 감옥에 갔다.  학생 시절 긴급조치법을 위반한 전력이 늘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돈도 없고 남편도 없고, 찬 바람이 몹시도 에이던 그 날들에도 그녀는 그곳에 그렇게 있었다.
‘희망교회’는 그 시절 남편의 개척 교회다. 이곳에서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고, 유치원도, 야학도, 진료소도, 모두 무료로 하였고, 어머니 교실, 신용협동조합도 만들었다. 젊은 부부는 소망과 뜻을 몸으로 때우며 풀어냈다.
민주, 민경이도 태어났는데 어떤 때는 너무 고달프고 힘들어 도망가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두 딸. 부모로부터 살아 있는 교육을 받았던 그녀는 아이들을 어떻게 키웠을까?
승합차에선 엄마에게 기대어 졸던 티 없던 아가씨들. 새벽부터 일어나 봉사하던 감리교 신학대 신입생 민경과 같은 학교 대학원생 민주. 화장기 없는 해맑은 모습이 예쁘기만 한 딸들이 변변한 새 옷 한 번 못 입어 보고 자랐다니 놀랍다. 두 딸은 물론 밥도 잘하고 일도 잘한다. 애기 때부터 엄마가 가는 곳을 다 따라 다니며 도왔다. 고사리 손으로 풀도 붙여가며…. 남을 돕는 일은 두 딸에게 역시 생활의 일부다.
“엄마랑 똑같은 방식을 택하진 않겠지만 그런 삶을 바래요. 그렇게 살고 싶어요.”
초롱초롱하며 다감한 눈길을 보니 마음이 뿌듯해진다. 저 예쁜 모습으로 아이들과 어울리고 설거지도 해주며 살아 가다니…. 희망이란 씩씩한 나무에 그녀는 지금도 물을 주고 있었다.

신나는 집
안산 ‘신나는 집’에서 아이들 밥을 먹었다. 과일 샐러드에 시금치 나물, 겉절이, 감자탕. 너무 맛있어 밥을 더 먹고 있는데 선영이가 다가와 말해 준다. “나도 강 목사님처럼 선교사 될 거예요.” “왜?” “아이~. 참 좋잖아요.”
그 자리에 있어주는 사람. 업어 달라고 할 수 있는 사람. 작지만 큰 여성 강 목사가 희끗희끗하게 센 머리를 하고 소탈하게 웃었다.
판자촌의 대모. 기다란 나무판대기가 담이 되기도 하고, 방이 되기도 하고, 개중엔 구멍이 난 판대기가 있어 거기에 눈을 대고 들여다보며 호기심으로 눈을 뒹글 굴리던 그 판자촌. 늘 가슴에 담아 두고 꺼내 보는 변질되지 않는 첫사랑처럼 풋풋하게 그녀가 그 자리에 있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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