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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그대가 되어 “죽을 때까지 남편 위하며 살려고요” 이인영

충남 천안시 성환읍 대흥리 노인회관 옆 골목길. 다문화가정의 몽골출신 이주여성 떠르지재벤(38) 씨가 달려 나와 반가움을 표시한다. 그의 둘째 딸 명웅(4)이도 따라와 낯을 가리지 않고 안기며 친밀한 인사를 한다. 2002년 한국으로 시집온 떠르지재벤 씨는 주말부부로 두 딸과 거동이 불편한 시아버지를 모시고 화목한 가정을 꾸려왔다.

한낮의 한적함을 깨며 명웅이의 손을 잡고 노인회관 안으로 들어섰다. 점심을 막 마칠 참이었던 할머니들. 해콩을 듬뿍 넣어 갓 지은 밥을 퍼주며 먹으라고 성화들이시다. 충청도 할머니들의 소박한 인심에 젖어 물에 넣은 짠지며, 새우젓 호박나물, 콩나물을 뜨끈한 밥에 올려 맛있게 먹었다. 떠르지재벤 씨는 수박을 쩍쩍 자르며 싱크대를 떠날 줄 모른다.

“예의가 반듯하고 착해. 3명을 키운 거나 매한가지여. 뇌졸중 시아버지에, 두 딸에, 동네에 뭔 일 있으면 먼저 대들어하고 나무랄 데가 없어.” 할머니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를 칭찬한다. 7년을 극진히 봉양한 거동이 불편했던 시아버지는 78세를 일기로 올봄에 돌아가셨다.

“100만원 기부? 처음 듣는 소리야. 자기 살림도 어려운데…고마워.” 떠르지재벤 씨는 지난해 말 아산상 시상금 일부를 다문화가정을 위해 써달라며 천안시에 성금으로 내놓았다. 이 사실을 처음 듣는 할머니들이 ‘저런! 어쩌나’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가 어려운 형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남편은 모아놓은 돈은 없어도 참 좋은 사람이에요.” 떠르지재벤 씨가 말한다. 성금 낼 당시도 시아버지가 9개월째 입원하여 많이 고생할 때였지만 상금 받은 것이 너무 감사해 가만있을 수 없었다. 남편도 “도움을 받았으면 갚아야지. 더 많이 해야 하는데…” 하였다. 몽골에서 담배 재배를 하는 시동생 친구 덕에 만난 남편 이성우(52) 씨. 3남매의 장남으로 사람을 아끼는 무던한 사람이다.

초원에서 온 몽골의 장녀
“초원의 바람이 그리워요.” 몽골을 그리는 떠르지재벤의 마음엔 돌아가신 부모님이 함께 있다. 군무원 아버지와 선생님인 어머니. 어머니는 “좋은 일을 하면 복이 따라온다”고 하시며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돕곤 하셨다. 교육열이 높았던 부모덕에 떠르지재벤은 빡싱이히데드스로볼대학 몽골어교육과 대학원까지 마칠 수 있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울란바토르 시내 아파트에서 유복하게 지냈다. 후엔 초등학교 2년, 고등학교에서 3년 교사 생활을 했다.

여름 방학이면 가족들은 말, 양과 소를 맡겨 놓았던 시골의 초원으로 돌아가 자연의 싱싱한 공기를 마시곤 했다. 천막을 둘둘 말아 올려 바람이 통과하던 여름날의 게리(천막집), 지평선에서 떠오르던 태양, 천장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햇빛, 집 안에 앉아도 볼 수 있는 초원을 누비며 달아나던 바람, 밤하늘의 별, 어머니가 만들어주던 부드러운 타라크(요구르트)가 그에게 손짓하면 슬픔에 젖기도 한다.

“17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약한 눈을 보았어요. 장녀에겐 가족을 돌볼 책임이 있어요.” 몽골의 장남에겐 목숨을 걸고 가족을 지킬 의무가 있다고 들었다. 전쟁에 나가서 장남부터 아들이 차례로 죽을 수 있어 막내가 상속하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장녀도 가족을 지킬 의무가 있다고 떠르지재벤이 말한다. 5남매의 장녀인 그가 고등학교 교사  자리를 버리고 한국 남자를 택한 것은 남편의 착한 심성을 믿게 되고, 아픈 어머니 병원비며 대학교까지 보내고 싶은 어린 동생들 때문이었다. 교사 월급 15만 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말할 때면 그의 단정한 입과 진한 밤색의 맑은 눈동자가 빛나기 시작한다.

세계에서 가장 영웅적이라는 칭기스칸을 존경하는 사람들. 병사로 차출된 아들을 먹이기 위해 후방의 가족들은 같이 이동하며 젖을 짜 말린 것과 양고기를 말린 보르츠로 군량지원을 했다고 신현덕 교수는 저서 ‘몽골’에서 얘기한다. 칭기스칸은 완벽한 통신보완정책, 이질문화 포용 등의 비범한 통솔력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해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세울 수 있었고, 몽골은  ‘세계의 중심’이란 뜻이라고 한다.

과연 떠르지재벤도 칭기스칸을 존경하나 보다. 가죽으로 만든 칭기스칸 초상화가 안방 벽,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붙어 있다. 그에게서 저절로 채워지는 자연의 기상이 느껴진다.

돕는 삶 가르친 친정어머니
경기도 용인장례식장 매점을 운영하던 남편은 무뚝뚝하지만 아내를 아꼈다. 그도 남편을 따르며 가족을 사랑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되신 시아버지를 위해 근처 사는 시외숙모에게 매일 물어봐 음식을 해드리고, 연년생으로 태어난 딸 명환이와 명웅이를 위해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했다.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 속에 아이들은 유치원과 어린이 집에서 잘 적응하며 밝게 성장하고 있다.

“여기서도 선생님을 계속하고 싶어요. 천안시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전문강사 양성 교육을 받으며 준비하고 있습니다. 배우고 가르치고, 또 배우며 내 아이는 물론, 여러 다문화가정에도 도움을 드리고 싶지요. 정보가 제일 중요해요.”

하루가 모자라는 떠르지재벤. 상명여대에서도 공부하며 한국어능력시험에도 대비하고 있다. 병원, 법원 등에서 통역 및 번역 자원봉사를 하며 이주 여성의 한국 정착을 지원하는 데도 열심이다. 한국에는 몽골인이 불법체류자를 합해 4만 5000여 명 있으며, 몽골 다문화가정이 천안에 10가정, 성환읍에 3가정이 있어 이들과 서로 격려하며 친분을 나눈다.

남편은 결혼 후 매달 25~30만 원을 친정집에 꼬박 꼬박 보내줘서 동생들 학비 마련에 큰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매점이 폐쇄되고 시누이네 자동차 공구점에서 일하는 형편이라 결혼 3년 후부터는 송금을 못하고 있다. 그는 그런 남편을 두둔한다. “비록 나이가 많아 회사에 취업은 못해도 술, 담배 안 하고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형편이 넉넉지 못해도 어려운 친척 집에 가면 돈을 드리고 오지요. 친정어머니처럼 참 좋은 사람이에요.” 그에게 좋은 것은 친정어머니 이미지로 통한다. 4년 전 타계하신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임종을 바로 앞두고 찾아뵈어 말 한마디 못 나눈 걸 가장 슬픈 일로 기억하고 있다.

詩로 만남에 화답해준 몽골 여인
동생들은 그의 바람대로 대학 재학 중이거나 졸업했다. 대학 졸업한 여동생은 결혼해 벨기에에 있고 남동생은 몽골항공 승무원이다. 아직 대학을 졸업 못한 동생 둘은 여름 방학마다 한국에 와 3달 동안 전단지 붙이기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여 학비를 번다. 올해도 한국에서 땀 흘리는 동생들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대견하다. 떠르지재벤의 모습에서 한국 60, 70년대의 언니와 누나가 보인다. 순박한 미소에 굳센 의지와 애잔함이 같이 묻어있다. 올해로 한몽 국교수립 20년이 되었다. 인종적으로 한국과 가장 가깝다는 몽골의 떠르지재벤이 양국의 활발해진 교류로 한국인의 아내가 되었다.

케이크 선물을 하려고 빵집에 갔다 온 사이 롯데리아에 남아 닭튀김을 먹던 큰딸 명환이가 울었는지 눈이 빨갛다. 손님에게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얘기해 엄마에게 혼이 난 거다. 비굴함을 싫어하는 엄마 마음도 모르는 채 엄마를 꼭 닮은 명환이가 천진한 표정으로 다시 웃는다.

몽골인들은 괴로움도 즐거움도 詩로 잘 표현한다고 한다. 떠르지재벤이 시 하나를 짓는다. 몽골 여인의 국문 시가 사랑을 노래하며 가을을 맞이한다.

“당신이 남들 보다 먼저 성공의 열쇠를 찾았다면 그 행복의 길로 이웃을 데리고 가세요.
오늘은 내가 웃고 남이 울지만 내일은 내가 울고 남이 웃을 수 있으니까 서로 사랑하기로 해요.
태어나고 죽는 것이 사람의 인생 붉은 해가 우리를 똑같이 비추어 주네요.
다른 어떤 것도 필요 없어요. 서로 사랑하기로 해요.”

그가 말한다. “죽을 때까지 남편과 위하며 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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