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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장학생 농촌봉사 “가슴 속 정(情)을 깨워라!” 윤진아

포도밭에 둘러앉아 시끌벅적 담소를 나누며 포도알을 솎아내는 학생들의 모습이 흡사 잘 짜인 뮤지컬 안무같이 경쾌하다. 철사에 긁힌 상처가 따끔거리지만, 오늘의 시간은 잘 익은 포도만큼이나 달콤하다. 농촌 살리기 프로젝트에 기꺼이 몸을 싣고 젊은이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완수하고 있는, 아산장학생 모임 ‘정담회’ 학생들의 여름 농촌봉사활동 이야기다.

똑똑한 여름나기
“어허~ 그러는 거 아니야, 포도넝쿨에 그렇게 맥락 없이 철사 돌리는 거 아니야~.”
“그렇지! 이 정도는 돼야 농활 3년차라고 할 수 있지!”
알알이 열린 포도알만큼이나 많은 대화가 영그는 이곳은, 충남 보령시 성주면 개화리의 한 포도밭이다.

일하던 중 불현듯 악상이 떠올라 농활가를 작사, 작곡한 자칭 ‘천재 싱어송라이터’ 원동재 학생이 “차라리 힘쓰는 게 더 좋은데, 섬세한 작업이라서 손이 좀 느리네요”라며 머쓱한 표정으로 포장지를 집어 들었다. 오늘 아침에 작곡했는데 반나절이 채 지나기도 전에 ‘만화주제가와 동요를 절묘하게 섞은 것 아니냐’는 표절 시비에 휩싸였으니, 과연 예술가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며 너스레다.

이색 헤어스타일로 ‘2010년 농활 패션 테러리스트’ 불명예를 안은 김동암(24) 학생은 “앞머리가 눈을 찔러서 묶었을 뿐이고, 다 같이 팔에 끼운 토시인데 거구인 내게 배정된 색이 기구하게도 핫핑크여서 오명을 쓴 것뿐, 억울하다”고 해 또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얼굴이 새까맣게 탄 임수정 학생은 오늘만 벌써 900개가 넘는 포도송이를 싸고 있다.
“포도 하나 키우는 데 손이 이렇게 많이 갈 줄 몰랐어요. 포도순 따주기, 잡풀 안 자라게 부직포 깔기, 가지치기, 포도알 솎아내기 등등 할 일이 끝도 없더라고요. 앞으론 포도씨도 안 뱉어내고 먹을 거예요!”

이렇거나 저렇거나, 흙 묻은 손으로 부채질하는 모습이 썩 건강한 농군처럼 보이는 그들이다. 뜨거운 여름 한복판의 포도밭에도, 이들의 가슴 속에도 알알이 굵은 포도가 싱그럽게 영글고 있는 모양이다. 포도밭 주인 우영례(50) 씨가 “일손이 없어 밭을 전부 갈아엎을 참이었는데, 학생들이 와서 겨우 살렸다”며 안도의 숨을 내쉰다.

여름방학이 시작됨과 동시에 봉사활동에 참여한 정담회 회원은 모두 60여 명. 먼발치에서 관망하지 않고 농촌 살리기에 능동적으로 동참하기로 한 이들은 여덟 명씩 다섯 개 조로 나눠 각 농가로 흩어져 포도 봉지 씌우기, 버섯·감자 캐기, 논밭 잡초 제거 등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일손을 도왔다. 개화 1·2·3리 논밭을 책임진 드림팀답게, 매일의 미션을 완수할 때마다 월드컵 16강 진출만큼이나 짜릿한 희열이 밀려든단다.

건강한 구슬땀의 축제
땡볕 아래에선 긴 옷과 밀짚모자가 필수다. 개화3리 감자밭에선 김종례(46) 아주머니가 이정민 학생을 두고 혀를 끌끌 차며 한껏 목청을 높이는 참이다.

“허이고, 저노무 자식. 지발 좀 옷 입고 댕기라고 그렇게 일러도 말 참 드럽게 안 듣고 시절을 떠네. 저러다 햇볕에 시뻘겋게 타면 며칠 생고생한다니께. 일 잘 허니 냅뒀지, 우리 아들 같았으면 아주 그냥 두들겨 패서 옷 입혔어!”

건장한 청년회장의 자태를 연출한답시고 며칠째 웃통을 벗어젖힌 문제의 이정민 학생은 “아주머니 말씀 안 듣고 까불다가 몸이 제대로 탔네요. 예방차원에서 화상연고도 발랐으니 내일 마무리 작업하는 데는 지장 없을 것 같아요. 뭐, 공짜로 태닝까지 했으니까 이런 게 일석이조 아니겠어요?”라며 몸에 묻은 흙을 대충 씻어내고 아주머니가 내민 수박을 받아들었다. 저녁까지 작업이 이어지기 때문에 도중에 꼼꼼히 씻는 ‘낭비’는 하지 않는단다.

수확에서 포장까지 학생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끝이 없다. 습기와 열기로 가득한 비닐하우스 안. 가만히 있어도 등줄기에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이곳에는 열흘 뒤면 소비자 밥상에 오를 무공해 표고버섯들이 가득하다. 하나에 13kg은 족히 나가는 버섯 상자를 번쩍 들고 나르는 청년들이 김종화(63) 씨는 영 대견한 모양이다. 폭우로 망가진 비닐하우스 수선도 대학생들의 봉사활동이 아니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작업이란다. 고령화된 농촌마을에 손자뻘 대학생들의 방문은 가뭄 속 단비처럼 반갑고 즐거운 일이다.

“어르신들이 기특하다며 자꾸 간식을 갖다 주시는 바람에 되려 죄송스러워 혼났네요. 버섯이 생각보다 무거워 허리가 으스러지는 줄 알았는데, 같이 일하시는 어르신들은 제대로 쉬지도 않으시더라고요. 한 어르신께서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매일 열심히 일하는데도 먹고살기 어렵다’고 하소연하시는 걸 듣고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며칠을 함께하다 보니 어르신들과 각별한 사이가 됐지요. 어르신들이 손자손녀를 보는 날이라고는 명절을 포함해 1년에 두세 번이 고작이라고 하니, ‘니들이 우리 손주나 다름없다’는 말씀이 그냥 하시는 말씀은 아닌 것 같았어요.”

받아줘서 고맙고 와줘서 고마운 사람들이 알알이 엮어가는 건강한 구슬땀의 축제. 마을 이장님이 건넨 차 한 잔씩을 마신 학생들이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짓는다. 이제 다시 일할 시간. 단 몇 분의 시간도 헛되이 낭비하지 않기 위해 분주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들에게, 청량한 산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악수를 건넨다.

재능나눔 ‘농활 플러스’
평소 주민들이 모여 한담을 나누는 사랑방에, 오늘은 학생들이 모여앉아 마을 아주머니가 한 아름 안겨준 찐 감자와 수박을 나눠 먹는다.

오철승 동문회장이 고기와 수박을 바리바리 싸들고 응원 차 들러 더욱 사기가 올랐다. 방안 가득 웃음꽃이 만발이다. 일상 사이사이 이렇게 서로에게 건네는 웃음이야말로 삶을 따뜻하게 껴안는 힘일 것이다.

길었던 여름 해가 저물어가지만, 아직 일정이 끝난 것이 아니다. 이번엔 학생들이 호미 대신 분필을 들었다. 성주지역아동센터에서 마을 어린이들의 학습지도를 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단순히 일손을 돕는 데서 더 나아가 각자의 재능을 농촌문화에 더하는 참이다. 33기 정담회장 신승민 학생은 “젊은이들은 힘과 재능을 나누고, 어르신들에게서 농촌의 전통문화를 배워갈 수 있으니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학교에서 ‘스펙’ 쌓기에 바쁜 친구들이 접하지 못할 귀한 경험”이라며 “풀독과 싸우고 비지땀 흘리면서, 취업경쟁보다 훨씬 소중한 땀의 가치를 배우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포도는 태양에 등을 돌리지 않는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단꿈이 영그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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