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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숨은 예인 토란잎에 빗방울 떨어지는 설장구 진옥섭

담양 땅 어디라도 그렇듯 대숲이 무성하다. 바람 들어 분주히 손 흔드는 대숲을 지나 큰길을 넘자 고대광실이 나온다. ‘우도농악전수관’이란 간판이 걸렸고, 우도농악의 명인들을 기리는 비가 서 있다. 광주에서 담양에 드는 국도변, 이제 같은 길에 있는 정철의 송강정보다 더 눈에 띈다. 풍류주인인 장구잽이 김동언(金東彦 70), “대나무 덕분이지!”첫 마디를 낸다.

그렇다. 오동나무통으로 만든 장구는 대나무 덕분에 소리가 난다. 우선 대나무를 잘게 쪼개 나긋한 채를 만들어 열편을 친다.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오른 대나무처럼 “딱!” 하는 고음이 난다. 또 땅속을 파고든 뿌리를 캐서 궁편을 만드는데 심금을 파고드는 “궁!” 저음이 난다. 열채는 “딱!” 맥박의 소리요 궁편의 “궁!” 심장의 소리이다. 이 두 소리가 한데 합수치는 “덩!” 소리에 둥그런 원이 번지고 그 속으로 훌쩍 뛰어들어 노니는 것, 그것이 ‘설장구’다.
제가 낸 소리에 제가 뛰노니 저절로 춤이 되는 것이다.

묘한 소리에 홀린 소년 농군
김동언은 전남 담양군 봉산면 와우리에서 태어났다. 마을에는 정월 대보름이면 ‘마당밟기’가 성했고, 흥 많은 소년은 소고를 들고 따랐다. 탐나는 것은 신통한 장구소리인데, 당시 장구는 나락 한 섬 값의 귀물이었다. 궁리 끝에 쳇바퀴를 통으로 삼고 둥그런 대나무 테에 광목천을 꿰매 가죽처럼 만들어 통의 양쪽에 붙였다. 어린 손으로 만든 어설픈 장구에서 제법 신통한 소리가 났고, 다달이 나날이 느는 소리가 근동을 자자히 울렸다.

열다섯 무렵, 못 듣던 소리를 들었다. 영산강변 씨름판에 몰려든 구경인파를 겨냥하고 전을 친 약장사패였다. 최막동이 장구를 치고 이주환이 쇠를 잡고 있었다. 이주환은 쇠를 놓고 하모니카를 멋지게 불었으며 최막동은 앉은 채로 장고를 치며 입에 풀잎을 물고 초적을 불었다. 그저 귀신에 홀린 듯이 바라보다  “나도 한 번 쳐 볼라요.” 장구를 잡았다. 그렇게 스승을 만나 함께 떠돌았다.

호남 예술단, 말이 예술단이지 오일장을 떠돌며 약을 파는 ‘나이롱극장’이었다. 이 잡고 빈대 잡는 약을 팔았지만, 정작 잠자리엔 보리쌀만한 이와 둥개만한 빈대가 들끓어 아침이면 피범벅이 되었다. 그러나 옹골차게 마음먹고 신통한 장구소리에 덤벼들었다. 어느덧 장구를 메고 나서면 장구통에 주렁주렁 돈이 매달렸다. 이런 유랑의 행렬을 따르다가도 농번기가 닥치면 마을에 들어와 실한 장정이 되었다. 농번기 농군 농한기 한량을 반복하던 1958년 무렵, 전남 4-H경진대회에 마을 청년을 모아 농악단을 만들어 나가 특상으로 송아지 한 마리를 타기도 했다.

그러나 삶에 묻혀야 했다. 스무 살에 홀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일가들의 성화로 눈물도 마르지 않은 채 장가를 들었다. 가장의 삶이 기다렸다. 농사를 딸기, 토마토, 오이, 양파 등의 고등 원예작물로 바꾸었고, 농한기에는 대나무 바구니를 만들었다. 그것은 사시사철 들판에 매달려야 하는 일이었다. “한 20년 장구를 못 만졌지.” 슬하에 매달린 오 남매와 눈앞의 들판에 묻혀 놀이판을 잊어갔다.

1985년, 그에게 선배들이 찾아왔다. 누구나 “좋은 재주 두고 안에만 박혀있는가”하며 풍물을 권했다. 사십 중반, 다행히 살림에 여유는 없어도 땀 흘린 덕에 그리 부족하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광산농악에 나갔는데 도처에서 불렀고, 마침내 우도농악 본향의 하나인 영광에 발걸음을 하게 되었다.

이 땅의 농악은 크게 전라도의 호남농악, 경기 충청도의 웃다리 농악, 강원도의 영동농악, 경상도의 영남농악으로 나뉜다. 그중 호남은 농악이 참으로 세어서 서편 평야지대의 우도농악과 동편 산간지대의 좌도농악으로 나뉜다. 이 우도농악권 중에서 영광, 고창, 장성, 함평 등지의 농악은 한 테두리인데, 영광과 고창군 무장읍, 그리고 장성이 중심이 된다는 뜻으로 예부터 ‘영무장농악’이라 불렸다.

이 ‘영무장농악’이 결집된 영광농악의 상쇠는 전경환(全敬煥, 1921 - 1999)이었고, 장구가 김오채(金五彩, 1926 - 1994)였다. 당시 김오채의 신묘한 설장구는 명무전에서 단골 레퍼토리였다. 김오채 스스로의 말대로 “장판방에 콩 쏟아지듯” 자갈자갈 또릿또릿했다. 그리고 사뿐히 딛는 그의 디딤새는 그야말로 물찬 제비였다. 김오채의 장구는 새로운 세계를 열었고, 꾼의 길을 열어주었다. 1994년 스승 김오채가 자신을 후계로 지목하고 타계했고, 1996년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7호 우도농악 보유자가 되었다.

1991년, 담양에서 담양민속보존회를 조직하여 담양의 옛 멋을 되살리려 노력했다. 1999년에는 광주시 용전동의 옛 농요를 발굴하여 민속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타기도 했다. 광주시 북구청소년수련관, 담양문화원 등지를 다니며 예능을 전수한다. 이제 전국의 각처에서 사물놀이를 하는 젊은이들이 옛 멋의 장구를 배우러 몰려온다. 또릿또릿 다부진 장구소리야 사물놀이가 터득하였지만, 그 춤추는 몸은 등한했던 것이다.

죽림의 풍류주인
10년 전, 김동언 명인을 찾았었다. 당시 춤을 찾아 예기와 한량, 탈꾼과 풍물꾼을 찾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명인 김오채가 이미 작고한 후였다. 수소문했더니 후계가 김동언 선생이었다. 그분의 주소가 담양군 봉산면 와우리였다. 혹시 이 분이 어린 날 보았던 ‘와우리 장구쟁이’가 아닐까했다.

고향 담양군 봉산면에는 광복절이면 리(里)대항 축구대회가 벌어졌다. 잊을 수 없는 풍경은 와우리 마을에서 선수 입장을 할 때 장구치고 선두에 서는 사람이었다. 면민들은 누구나 ‘와우리 장구쟁이’라 불렀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아는 길로 와우리에 접어들면서 혹시나 명인이 아니면 어쩌나 걱정도 했었다. 어린 날 춤의 추억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한 가락 부탁했을 때, 그분의 장구에서 날벼락 치는 가락이 쏟아졌다. 좌르르 흐르는 물샐 틈 없는 가락, 김오채의 가락에 자신의 가락을 얹은 것이었다. 그리고 “궁따쿵!”을 연달아 한 번, 세 번, 다섯 번, 일곱 번, 몰아치는 ‘후드득 가락’을 쳤다. 어린 날 들었던 토란잎에 빗방울 떨어지듯 후드득 후드득거리는 소리였다. 쉬었다는 20년, 새마을운동의 부지런함 때문에 느긋한 흥들이 사라지던 시절이었다. 선생은 삶을 매진하면서도 장구를 놓지 않았다. 홀로 나서서 장구를 치며 ‘통일벼’, ‘유신벼’로 누렇던 들판을 쉼 없이 울렸던 것이다.

2009년 선생은 자신의 마을 뒤 논밭에 우도농악전수관을 완공했다. 그리고 선배 명인들의 성함을 깊이 새긴 비를 세웠다. 다시금 청했더니 흔쾌히 장구를 메고 장단을 꺼내는데, 양철지붕에 소나기 쏟아진다. 그리고 그 빗속을 날렵히 거니는 몸짓, 군더더기 없는 춤이었다. 어느 것 하나 전과 다를 바 없다. 다만 고희가 다 된지라 살짝 하리가 굽었다. 예술도 논의 벼처럼 익으면 고개를 숙이는 모양이다. 멀리 대밭에서 풍물바람에 든 대나무 이파리들이 바스락거렸다.

※  설장구 : 일어서서 장구를 어깨에 걸어 메고 치는 장구,  또는 두레패, 걸립패, 농악대 따위에서 장구를 잘 치는 사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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