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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으로 가는길 성숙, 향긋한 그 말 김열규

성숙이라면 햇과일 입에 무는 향기며 맛이 실감되곤 한다. 온 몸에 달고 살가운 감각이 넘친다. 그런 게 성숙이고 익음이다. 과일이 성숙하듯  인간의 삶도 숙성한다. 그것은 무척 향긋하다. 인생의 성숙에도 삶의 익음에도, 한가위 무렵 가을의 낌새로 넘치게 된다. 황금빛으로 물살 짓는 논, 넘실대는 그 벼 이삭처럼 풍요에 설레는 것, 그런 게 우리들 인생의 익음이고, 우리들 목숨의 성숙이다. 성숙은 풍족함이고 넉넉함이다.

자랄 만큼 자라가면서 어린이며 젊음은 성숙해 간다. 키가 크고 몸이 나고 하는 것이 성숙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육신만이 자라는 게 아니다. 정서도 정신도 자라가는 게 성숙이다. 머리도 가슴도 익어가야 한다.
세상 보는 눈길이 제 몫을 하고 , 남들 대하는 자세가 올곧고 , 그래서는 자기 자신을 관리하는 마음이 밝게 맑게 터전을 닦아 나가는 것, 그게  인간으로서 제대로 보람되게 누리게 되는  성숙이다.
식견(識見)이 늘고 지식이 부풀고 의식이 눈뜨고 해서는 성숙을 이룩해야 한다. 그러면서  세계며 사회 속에서 잡게 될 자신의 자리에 대해서 또 자신의 소임에 대해서도 눈뜨게 되어야 한 개체의 성숙이 제대로 되어 갈 것이다.      
그건 ‘사람이 된다’고들 일러온 그 경지다. 사람됨이 바르게, 곧게 길러져 가는 것, 그것이야 말로 인간 성숙이다. 그래서 성숙은 고운 인격, 올곧은 품격을 겸하게 된다.

‘사람 됨됨이!’ 
그것은 좋은 말이다. 그것에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고여 있다. 바람직하고 기댐직하고 더 나아가서는 받들 만한 것, 그게 다름 아닌 사람이라고 ‘사람됨됨’은 일러주고 있다. 그 말에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그나마 신앙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믿음이 곱게 어려 있다.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 사람으로 목숨 부지하고 있는 데 대한 설레는 감회가 ‘사람됨됨’에는 서려 있다. 그래서 ‘사람됨됨’을 제대로 올바르게 갖추어 가는 것이 곧 성숙이 되고 숙성이 된다.
‘사람답게!’ 라는 그 한 마디 , ‘사람 구실’이라는 그 한 말씀에 실어서 우리는 인간 성숙을 생각하고 다짐 둘 수 있어야 한다. 육신만 어른답게 자라는 것, 그로써만 인간 성숙을 가늠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적 성숙과 사회적 성숙
그래서 사람됨에는 사회의식과 윤리 감각이 깃들여 있어야 한다. 주어진 크고 작은 사회 속에서 자신이 맡아내어야 할 구실을 남들을 위해서 해낼 수 있어야 한다. 해서 성숙한다는 것은 사회인이 되어 감을 겸해야 한다. 각자가 ‘세계 속의 나’가 되어야 한다.
남들과 어울려서 각자의 몫을 도맡아 내지 않고는 한 개체가 성숙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웃과 동료와 공동체 구성원들과 함께 할, 하나로 어울릴, 그 공존이며 공생이 잘 경영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성숙한 사람일수록 ‘우리 속의 나!’가 될 것이다. ‘나 먼저!’가 아니고 ‘우리 먼저!’가 행동의 지침이 될수록 거기 비례해서 한 개체는 성숙해 갈 것이다. 우리에 눈뜨는 것이 곧 성숙이다. 거기 겸해서 ‘나보다는 남!’이란 생각으로 작고 큰 행동을 할 수 있으면 한 개인의 사회적 성숙은 더 바랄 데 없이 이룩되어 갈 것이다. 한 개체의 사회적 성숙이 곧 인간적 성숙을 겸하게 될 것이다.

해서 인간적 성숙은 윤리의식과 단짝이 되어야 한다. 윤리적 의식 없는 사회적 의식이란 있을 수가 없다. 한데 윤리의 기본적인 기틀은 각자가 자기 자신의 인격과 인품을 빈틈없이 가꾸고 다듬는 데서 비롯한다. 
물론 윤리는 타인을 의식하고 사회를 의식하고 있지만, 그런 것을 전제로 삼고 있지만, 그래도 그런 것에 앞서서 자기 자신의 인품이며 인격을 다듬고 갖추고 하는 것을 으뜸으로 전제로 삼고 있다. 윤리란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에서 비롯한다. 남보다 앞서서 내가 나답게 또 사람답게 되는 것이 윤리의 근본이다. 
하니까 내가 성숙한다는 것은 당연히 윤리 의식의 성장을 전제로 삼게 된다. 남에게 부끄럽지 않고도 나 스스로에게 아쉬움이 없는 인간으로 이룩되어 가는 것, 그것이 성숙의 마지막 지표다. 보람이다. 그러면 온 사회가 그리고 세계가 성숙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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