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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족 “청산을 사랑하며, 가족을 아끼며…” 김열규

“여기가 내 바다요. 저 앞에 보이는 섬이 자란섬. 자줏빛 난초의 섬이라는 뜻이죠. 뒷산은 좌이산(佐耳山)이니까 귀를 도우는 산, 듣는 것을 돕는 산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을까?”
경남 고성군 하일면 성촌리 319번지. 이제는 접었지만 아직도 ‘카페 플로라’의 간판이 걸려있는 집. 눈을 들 것도 없이, 앞마당이 바로 바다였다. ‘내 바다’라는 말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이거 밤에, 그것도 보름달이 뜰 때 봐야하는데. 달이 뜨면 저 바다가 그냥 금빛으로 변해버려요.”
선생은 보름달이 뜰 때 앞바다가 얼마나 아름다운 색으로 변하는지 열심히 설명했는데 사실 그럴 것이 없었다. 햇살을 받으며 잔잔히 누워있는 바다, 점점이 떠있는 푸른 섬, 잘 익은 소금의 짭조름한 냄새, 맑은 바람 그리고 집 뒤, 밭에서 일렁이는 푸른 맥주 보리. 이것만으로도 감흥은 충분했으니까.

남로당 간부로 월북한 아버지
서강대에서 민속학자요 국문학자로 명성이 높던 선생은 1991년 학교에 사표를 던지고 이곳으로 상향(上鄕)했다(서울보다 더 좋은 고향으로 옮겼으므로 하향이 아니라 상향이라고 했다).
“선생으로서 청산에 사는 것이 안빈낙도라고 가르쳤는데 가만 보니까 내가 그걸 실천하지 않고 입으로만 떠들고 있더라고. 정철이나 고산 윤선도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이거 안 되겠다 싶어서 하루아침에 짐을 쌌지요.”
당시 선생의 낙향(당신의 말대로라면 ‘상향’)은 신선한 충격을 주어 신문마다 크게 다루었다. 건강도 문제가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알레르기가 심해 감기를 달고 살았다. 기침을 해대며 ‘이게 사람 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성읍에 있는 고향 생가를 찾으니 노래방이며 PC방이 들어서있어 서울이나 진배없었다. 그래서 연고를 찾아 들어온 곳이 지금 사는 장소다. 마침 아는 조각가가 천정이 높고 시원한 건물을 지어놓고 이사 가게 되어있어서 집 문제도 쉽게 해결됐다.
“겨울에는 영하 3도 이하로 안 내려가고 여름에는 28도를 넘은 적이 없어요. 여기 와서 감기는 한 번도 앓지 않고 이렇게 건강합니다.” 이 대목에서 선생은 부인에 대해서 고마워했다. 29세에 만나 49년째 해로하고 있다.
당시 부인 정상옥 씨는 수필가이면서 인사동에서 잘 나가는 화랑을 경영하고 있었다. 선생이 서울을 뜨자고 했더니 부인은 두말 하지 않고 짐을 꾸렸다. 세 자녀는 이미 장성한 터라 각기 자기 사는 곳에 남았다.
가족에 대해 묻자 선생은 두 사람을 꼽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다. 아버지는 남로당 간부로서 월북했다. 친구 이 모 씨는 해방 후 국회의원을 하면서 정계를 뒤흔든 국회 프락치 사건의 주동 역할을 했고, 월북해서는 평양시장을 지냈으니 아버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은 갔다.

서강대학교 교수 시절, 잊을만 하면 정보부에 불려갔다. 작은 방 의자에 앉혀 놓고 밤새 잠을 안 재운 채 “북에 있는 아버지로부터 연락 온 것 없냐?”는 질문만 반복했다.
한번은 밤에 불려가 새벽까지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어서는데 엉덩이가 의자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앓던 치질이 터져 피가 나오고, 그 피가 의자 바닥과 엉겨 붙은 것이었다.
“연좌제가 시퍼렇던 시절이었죠. 나중에 대학교에 사표 낼 때 학교 직원이 그러더군요. 이제 와서 말하지만 정보부에서 수시로 나와 체크했다고. 사표 받으라는 말도 여러 번이었지만 미국 신부님이 반대해서 내가 아무 탈 없이 교수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거죠.”
서강대는 서양 신부들이 재단을 세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도 선생은 좌익의 좌 자만 들어도 고개를 흔든다.
또 한 사람은 어머니다. 어머니는 서부 경남의 문기(文氣)를 이어받았다. 돌아가시기 이태 전까지 제사를 지낼 때면 손수 언문으로 지은 제문을 읽었다. 이웃이 부탁하면 제문을 써주기도 했다. 본인이 쓴 제문을 읽으며 어머니는 하염없이 울었다. 옆에서 듣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애절했다.
“나의 문학적 소양은 전부 어머니로부터 왔다고 할 수 있지요.”
선생이 당시로서는 천한 학문 취급받던 민속학을 하게 된 동기를 마련해준 사람은 외할머니였다. 외가는 통영이었다. 부산에서 하숙을 하다가 외가에 가면 할머니는 달걀의 양쪽을 뚫어 흰자위를 빼고 노란자만 남긴 상태에서 삶아서 말린 찹쌀을 거기에 한 알 한 알 넣었다. 조선종이로 구멍을 봉하고 진흙을 발라 잿불 속에 넣어두면 달걀 떡이 됐다. 식혜를 곁들어 먹는 맛은 지금도 침이 넘어간다.

“가족, 언어 이전의 공감대”
“가족이 뭡니까? 허물없이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피붙이라도 평생 피해를 준다면 정이 가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이 다 떨어져 살지만 수시로 멀리까지 운전해서 찾아오고, 손자 손녀는 엽서를 보내줘요. 얼마나 기쁜지….”
자녀 둘은 교수고, 한 사람은 현대고 교사다.
“이거 하라, 저거 하라, 평생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어요. 은연중에 공감대가 형성되는 게 가족입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는 가르치고 타이르는 과정이 있지만 가족은 언어 이전의 공감대가 있습니다.”
선생은 4년째 매주 왕복 3시간 걸리는 산청의 지리산고등학교를 찾아 아이들에게 무료 특강을 하고 있다. 주제는 글쓰기부터 삶에 대한 이야기까지 제한이 없다.
“아이들에게 무엇을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내가 더 배우고 느낍니다. 20대 중반에 서울 중앙고에서 3년간 교편을 잡은 이후 서강대에서 봉직했고, ‘상향’을 해서도 가르침의 길을 걷고 있으니 참 복 받은 삶이지요.”
요즘 나는 ‘생명의 전화(1588-9191)’에서 자살하려는 사람이나 가정의 어려움에 대해 호소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전화 상담을 하고 있다. 몇 가지 사례를 들고 나라의 어른들이 관심을 갖고 좋은 말씀을 해주시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요. 나만 청산에 살면 뭐합니까? 더불어 살아야지요. 같이 행복해야지요. 올해 수필집을 포함해서 세 권의 책이 나오는데 앞으로는 가족에 대해 좋은 글을 쓰겠습니다.”
어느새 저녁 햇살이 비끼고 있었다. 차와 커피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 까다롭다는 선생이 손수 타주신 커피를 마시며, 차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 길지 않은 시간. 마치 고향에 온 듯 편안한 시간을 뒤로 하고 나서는 발걸음이 못내 아쉬웠다.
눈앞에서는 여전히 선생의 ‘내 바다’가 청량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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