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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그대가 되어 아이들의 ‘가난한 어머니’ 이인영

서울 은평구 주택가의 좁은 골목길을 올라 ‘꿈나무마을(전, 서울시립소년의집)’을 찾았다. ‘마리아수녀회’가 서울시로부터 위탁받아 1975년부터 운영해온, 부모가 없거나 부모가 있어도 함께 살 수 없는 아이들의 보금자리다.

5~7세 아기들이 유치원에서 그림 그리기에 빠져 있다 말고 방문객에게 강한 호기심을 드러낸다. “누구세요?” 묻다가 대답이 성에 안 차는지 궁금증을 견디다 못해 급기야 자신부터 밝히기 시작한다.

“난 성재윤예요, 김효진이예요” 하다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종이에 이름을 써준다. 하나 둘씩 다가와 쓰더니 너도 나도 달려들어 쓰기 시작하는 이름 석자. 조그만 아기들이 또박또박 정성껏 쓰는 이름. ‘나 여기 있어요’ 하는 것만 같다.

이곳 800여 명의 아이들 중 550명은 미혼모의 아기들이다. 250명은 양육할 형편이 안돼서 오게 된 조손ㆍ한 부모 가정 등의 아이들이다.

‘꿈나무마을’은 어린이들이 잠재력을 계발하여 인생을 풍성하게 살아가도록 지도하고, 밝고 당당한 청소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모성애를 가지고 보호하며 교육한다. 학교에서의 인성・예체능 특기 교육과 도티기념병원의 의료서비스로, 양육과 교육의 통합서비스가 이루어지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부산 알로이시오 중학교로 갔던 아이들은 2년 전부터 서울지역 중학교에 일부 진학한다. ‘꿈나무마을’의 시설장 정영숙 말지 수녀는 지역 아동들과 함께 진학하는 것에 대해 “다양한 학교 선택권을 가지는 것이 좋으며 어차피 겪을 시련이 있다면 부딪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며, “자립프로그램을 초등학교 때부터 도입하고 있다. 아이들이 늘 받아도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삶의 진수를 느끼게 하고, 자존감을 갖도록 교육하고 있다”고 말했다.

빈자들의 성자, ‘알로이시오 몬시뇰’
“제가 아기를 가졌어요. 겁이 나 이때까지 그냥 있었어요. 아기 낳을 병원비도 없어요.”  겁에 질려있는 어린 미혼모는 도움을 청한다. 그를 감싸 안고 보호하는 수녀들. 아기들을 맡아 우리가 키울 테니 절대 낙태하지 말라며 위로하는 사람들. 생명의 수호자들이다.
‘마리아수녀회(전, 마리아보모회)’는 전쟁고아 및 빈민 환자들을 위한 봉사를 목적으로 미국인 사제 蘇 알로이시오 몬시뇰(교황의 명예 전속 사제)이 1964년 설립했다. ‘마리아수녀회’는 복음 삼덕 외에 ‘가난한 사람을 위한 봉사’라는 서원을 하며 ‘하느님을 즐거운 마음으로 섬기자’는 모토 아래 겸손과 헌신으로 봉사한다. 알로이시오 슈월츠 몬시뇰은 1957년 12월 부산교구의 선교 사제로 여의도 공항에 첫발을 내딛었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의 남빛 하늘에서 희망을 보았다던 사제는 그날 이후 일생을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바쳤다. 수만 명의 고아가 발생한 한국에서 양말도 못 신고 구두통을 둘러메고 추위에 떨고 서있는 소년,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아이들의 모습은 흔했다.

사제는 따듯한 돌봄과 교육을 위해서 직접 보육시설 운영에 들어갔다. 그는 수녀들로 하여금 엄마가 되게 했다. 폐렴에 걸려서도 후원자를 만나기 위해 목숨을 건 해외여행을 갔던 사제. 알로이시오 몬시뇰은 부산에서 ‘소년의집, 알로이시오중・고등학교, 마리아모성원, 마리아영아원, 송도가정, 알로이시오기념병원(전, 구호병원), 결핵환자를 위한 마리아구호소’를, 그리고 서울에서는 ‘꿈나무마을과 알로이시오초등학교, 도티기념병원, 부랑인 시설인 은평의마을(전, 갱생원)’ 등을 설립해 운영했다. ‘마라아수녀회’는 지금까지   7천여 명의 아동을 키워 사회로 내보냈다. 1981년 알로이시오 몬시뇰은 서울에서 발생하는 부랑인들을 수용 보호하는 은평의마을을 위탁 운영하면서 ‘그리스도회’도 창설했다. 1990년 이후 ‘마리아수녀회’는 소년의집과 학교 사업을 필리핀, 멕시코, 과테말라, 브라질로 넓혀나갔다. ALS(루게릭병)로 임종하기 직전까지 알로이시오 몬시뇰의 사랑은 그칠 줄을 몰랐다. 가난한 이를 위해서는 좋은 환경을 마련하려고 애썼으나 정작 자신은 평생 구두를 꿰매고 또 꿰매어 신으며 스스로 가난한 자의 위치를 끝까지 지켰다. 아름다운 사제 알로이시오 몬시뇰은 ‘빈자들의 성자’였다.

깽깽이발이 즐거운 엄마
유치원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 운동화를 짝짝이로 신은 여자 아기가 다가와 살며시 손을 잡는다. 아기와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간다. 그리곤 바로 헤어져 남자 아기들의 엄마 김봉자 가밀라 수녀를 만나러 간다. 짧은 길에서 만난 단비. 아기 손의 보드라운 감촉이 마음을 건드린다.
다니엘반 방에 남자 아기 10명과 수녀 엄마, 그리고 보육사 3명이 있다. 간식을 나누며 엄마가 묻는다.
“뭐 배웠어요?” “영어 배웠어요.”, “그림 그렸어요.”
“영어 뭐 배웠어요?” 엄마가 다시 묻는다. “ abcd요.”
“뭐 그렸어요?” 물어야 할 바로 그 찰나에 아이들은 이미 그 자리를 떠나 제멋대로 흩어졌다.  아기는 나무에 사과 열매, 김 열매, 그리고, 공룡 열매도 그려 놓았었다. 먹고 싶은 김, 갖고 싶은 공룡 얘기가 주렁주렁 남아있는데 이야기깃거리는 쿵쾅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소년처럼 활발하고 명랑한 김봉자 수녀. 21세 때 삼랑진 성당에 온 팸플릿을 보고 본당 신부와 부산 송도를 찾았다가,  22세 때 한 가정 6명 아이들의 엄마가 되었다. 샘물 길어 장 담그고, 김치 담가가며 음식 해 먹이고 아이들 키우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하느님이 원하는 역할이기에 즐겁게 해온 엄마. 그 엄마는 43년이 흘러 이제 60대 중반을 훌쩍 넘었다. 지금까지 350여 명을 키웠다. 졸업한 아이들이 좋은 직장에 다니고, 좋은 배필 만나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는 것이 보람되며, 50세 된 아들과 잘 자란 손녀를 보는 건 기쁨이다. 그런 그에게 생활은 쌓여 있지 않다. 주어진 날까지 하루하루 충실히 사랑하는 김봉자 수녀는 어려웠던 일들은 그때그때 흘려보낸다. 걸리지 않는 강물처럼 자유로운 그가 말한다. “놀이터에서 깽깽이발 하며 아이들하고 놀면 제일 행복해요.”

“뭘 잘해서 상 탔어요?”
“다음 달에 결혼해요.” 소년의집에서 자라 사회복지사가 된 이정환(33) 씨가 말한다. 신부도 이곳에서 자랐다. 그는 알로이시오 고등학교 졸업 후 회사에 들어갔다가 모은 돈으로 대학교에 입학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우여곡절 끝에 컴퓨터정보통신공학과를 졸업했다. 현대제철에 합격해 입사 날짜만 기다리던 중, 이곳 축구부 코치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도움 받고 자란 곳에서 자신이 경험한 미비했던 부분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1년 전에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고 복지기획팀에서 근무하고 있다. 신부는 무용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이곳을 ‘따뜻한 곳’이라고 표현했고 말썽을 부려 알로이시오 신부님께 매 맞은 기억을 즐겁게 기억해냈다. 집에는 자상한 어머니와 야단치는 사람, 아버지가 있었다.

현대, 삼성, LG 등 대기업에 많이 진출해 있는 아이들. 얼마 전에 현대자동차 정의선 부회장이 다녀갔다고 귀띔해 준다. S기업에는 1천여 명 취업해 있고 그중 80명이 과장급이라고 한다. 지금은 대학에도 아이들이 가고 있는데 “애처롭지만 자신이 어렵게 번 돈으로 대학에 가는 것도 좋다”며 김봉자 수녀는 말한다. 지난 2월 11일, 미사 반주를 위해 창단한 소년의집 관현악단이 정민(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 씨의 아들)의 지휘로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감동적으로 연주해 쏟아지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졸업생인 한 연주자는 “돌아가신 알로이시오 신부님이 생각났다. 이번 공연은 수녀님과 후원자 분들께 드리는 생애 최고의 감동적인 선물이었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고맙다는 인사의 대신이다”라고 밝혔다.
사회에서 자리 잡은 이곳 선배들은 지금 한창 미래를 향한 꿈을 꾸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마리아수녀회 수녀들과 의논한다. 한국에 취업한 필리핀 소년의집 졸업생들도 모임을 갖고 있다.
“엄마, 이게 뭐예요? 실 같은 게?” 아기가 이마의 주름살을 보고 묻는다.
“하느님께 받은 상금이야.”
“뭘 잘해서 상탔어?” 깜짝 놀라는 엄마, 김봉자 수녀. 상처에는 걸리는 법이 없더니 아이의 천진함에 스스로 걸려버리는 엄마. “이렇게 기쁘게 살았는데 양심껏 많이 못 드려 죄송한 마음”이라며 소년 같은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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