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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편지 내 고향 파도소리 윤후명

고향 길은 늘 내게 쉽지 않다. 이번에도 내 옛집 거리를 지나가다가 길을 놓쳤다. 이미 우리 집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래도 나는 사라진 집에 겹쳐 있던 옛집의 모습을 보곤 했었다. 지금은 사라진 옛 모습을 본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가능. 내 기억이 살아 있는 한 가능. 나는 내 기억을 믿었다. 기억이야말로 부활이다.

고향이 평생교육 도시로 지정되었다고 여러 문인들을 차례로 불러 독서 행사를 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오랜만의 고향 길에는 늦은 꽃들이 꽃잎을 흩날리고, 싱그런 신록이 하늘을 향해 가득 피어오르고 있다. 서해 바다에서 일어난 참사로 축제는 취소되었다고 해도, 계절을 어김없이 펼쳐놓는 식물들의 경이. 이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도시를 고향으로 두어서 행복하다는 말이 입가에 절로 흐른다. 세상 일이 아무리 어지럽고 못마땅하더라도 고향의 풍경 앞에서는 마음이 가라앉아 구김살이 펴진다.

그러나 고향 바다에 다시 온 나는 지난해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생각한다. 간단히 말해, 나의 태어남은 어머니와의 만남이었다. 그리고 죽음의 헤어짐. 여기에, 만난 사람 필히 헤어진다는 말이 있다. 나는 늘 누구와 만났다가 헤어질 때면 그 말이 떠올라서 마음이 멈칫하곤 한다. 우리는 늘 만나고 헤어지지만, 언제나 그 헤어짐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운명 속에 있다고 생각하면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언제 한번 보자고. 손을 흔들고 다른 방향으로 간다는 것,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라면? 이렇게 영영 헤어져 어디론가 가고 만다면? 이것이 끝이라면? 젊었을 때는 그것의 엉뚱함이 억울해서, 어이가 없어서 밤새 술을 마셨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내게 열아홉의 처녀이다. 그 나이에 나를 낳았기 때문이다. 열아홉 살 처녀와 만나 지난해 저 바닷가에 뼛가루를 뿌리기까지가 지금까지의 내 생애의 요약이다. 그래서 고향 바다는 예전까지의 바다가 아니라 어머니와의 관계 아래 펼쳐진 바다인 것이다. 나는 예전과는 다른 바닷가를 걷는다.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똑같은 풍경을 똑같지 않게 겪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삶이다.

병원에서 내일모레, 하고 마지막 시간을 다투는 사람에게 다음날 다시 오리라고 인사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좀더 깊고 간절한 어떤 절차란 없는 것일까.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도대체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그렇게 지구는 무덤덤 돌고 있을 뿐이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가벼운 헤어짐. 죽음이란 일상보다도 더 일상적이어서 절망적이다.

그렇게 삶은 죽음을 안고 흘러간다. 저 바닷가에 어머니의 뼛가루를 뿌린 이래 나는 모래를 뼛가루로 여기고 싶어 한다. 지구 저쪽 어느 바닷가의 백사장의 모래는 모래가 아니라 산호의 뼈들이라고 했다. 그런 것처럼 이제 고향 바닷가의 모래는 떠난 사람들의 뼛가루가 되어도 좋을 터이다. 그래서 나는 저 바닷가의 뼛가루를 즈려밟고 어머니를 만난다. 이제 헤어짐이란 없는 것이다.
 
‘어머니. 당신은 그렇게 갔습니다. 그러나 파도가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저곳에 당신은 있습니다. 나에게 삶을 주시고,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나를 지켜주신 당신. 전쟁 때는 방공호와 돼지우리에서도 나를 감싸 안으셨고, 감자 한 알의 끼니도 어려웠던 시절에 나를 먹이기에 힘쓰신 당신. 내 학비 때문에 이 집 저 집 밤늦게까지 다니며 어려운 발길을 하신 당신. 꽃을 좋아해서 내게 그 생명을 전해주신 당신… 당신은 결코 가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내가 저 파도소리를 듣는 한, 당신은 모래에서 뼈를 일으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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