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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일화 빈대에게 배워라 .





‘정주영’을 연호한 노동자들
80년대 후반 노사분규가 한창일 때였다.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에서 노사합동 연찬회가 있었는데 ‘재벌과의 대화’시간에 정주영 이사장은 다른 총수들과는 달리 선뜻 초청에 응했다. 분위기는 냉랭했다. 아무도 박수를 안 치고 팔짱을 낀 채 정 이사장의 말을 들었다.  정주영 이사장은 이에 아랑곳없이 한 시간 동안 강의를 하였다. ‘왜 나는 노동자 편인가.’ ‘어떻게 하면 돈 많은 노동자가 되는가.’ 등을 화제로 청산유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강의가 끝날  때 모든 참석자들은 기립박수를 치며 ‘정주영’을 연호했고, 가슴을 졸이며 지켜봤던 현대 임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문대학
박정희 대통령은 평소 초등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한 정주영 이사장이 누구보다 박식하고 정직한 성품의 소유자라는 데 호감을 갖고 있었다. 하루는 경부고속도로 공사에 관해 상의하기 위해 정 이사장을 청와대로 불렀다.
“초등학교 밖에 안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쟁쟁한 대학 출신들에게 일을 시키려면 어렵지 않던가요?”
“저는 신문대학을 나오지 않았습니까.”
“신문대학이라뇨?”
“저는 매일 신문을 머리기사에서부터 광고까지 빠짐없이 읽습니다. 일반 대학 출신들이야 몇몇 한정된 교수님한테서 배웠겠지만 저는 무수한 교수님들이, 그것도 일류 교수님들이 신문에 기고하신 글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옥스퍼드 유머
1971년 조선소 건설 당시 정 이사장은 차관을 도입하기 위해 영국으로 날아갔으나 버클레이즈 은행의 문턱은 높기만 했다. 지금도 회자하는 ‘500원 짜리 지폐’ 아이디어로 협력사로부터는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으나 버클레이즈 은행 부총재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 부총재는 정 이사장의 보잘 것 없는 학력을 빗대어 “정 회장, 당신의 전공은 뭡니까?”라고 물었다. “부총재님, 당신은 내가 제출한 사업계획서를 보지 않았습니까.” “물론 봤지요. 서류는 훌륭하고 완벽했습니다.” “그 사업계획서가 나의 전공이요, 내 박사학위 논문인 셈입니다.”라고 말했다. 정 이사장이 순간적으로 내놓은 유머에 부총재는 한바탕 웃은 뒤 ‘옥스퍼드 경제학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도 이런 사업계획서는 못 만들 것’이라며 ‘OK’ 사인을 내렸다.

빈대에게도 배워라
정 이사장이 노동자 시절 인천부두에서 노동을 하고 있었는데 , 합숙소에 빈대가 많아 잠을 잘 수 없었다. 궁리 끝에 긴 식탁 위에 올라가 잤다. 그러나 빈대들은 이내 식탁 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와 온몸을 물었다. 정 이사장은 다시 머리를 써서 식탁 다리 밑에 대야를 놓고 물을 채웠다. 이틀 동안은 단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빈대들은 벽을 타고 천정으로 올라가 식탁 위로 떨어지는 새 방법을 개발했고 다시 물리기 시작했다. 그 후 정 이사장은 “빈대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며 사원들이 고민하도록 야단치기도 했다.

해보지 않은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1976년 사우디 주베일항 공사 입찰을 앞두고 현대건설 관계자는 9억 3천만 달러의 입찰가격을 생각하고 있던 정주영 이사장에게 입찰가가 낮아 손해를 볼 수 있다고 보고했다. 당시 현대가 써넣은 입찰가는 세계 유수 건설업체들이 내놓은 가격의 절반 수준이었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손해 보는 장사가 분명했다. 그러나 정주영 이사장의 생각은 달랐다. 모든 기자재를 울산 현대조선소에서 제작, 사우디까지 운반하면 공사비를 대폭 줄일 수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자켓 89개를 울산에서 운반, 완벽하게 설치했다. 당시 공사에 참여했던 권기태 전 현대건설 부사장은 “‘해보지 않은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라는 정주영 이사장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10층이 될 뻔한 전경련 회관
1977년 전경련 회장으로 취임한 직후 정주영 이사장은 직원들에게 전경련회관 공사의 진척상황을 물었다. 전경련은 여의도에 회관 부지를 마련했으나 정작 공사를 시작할 수가 없었다. 전경련은 회관의 높이를 지상 20층으로 계획했으나 군부대에서 반대했다. 인근에 설치된 고사포의 시계를 가린다는 이유였다. 당시 군부대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정주영 이사장은 “건물이 고사포의 시계를 가린다면 고사포를 전경련 건물 옥상으로 옮기면 될 것 아니냐”고 제안했고 군부대도 이를 수용했다. 전경련회관은 1979년 11월 준공됐고 아직도 재계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압구정동 배 밭
1970년대 초, 정주영 이사장은 팔당댐 현장으로 가던 중 현재의 압구정동에 들러 점심식사를 했다.  배나무 밑에서 식사를 하던 정 이사장은 돌연 “그냥 돌아가자”라고 말했다. 당황한 직원들은 이유를 물었다. “이 배 밭에 집을 짓는 것이 좋겠다”면서 땅을 매입하도록 지시했다. 우연한 기회에  배나무 밭 식사가 오늘 날 대표적인 아파트 타운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가 들어서게 된 계기였다. 당시는 웬만한 부동산 전문가도 압구정동 배나무 밭의 가치를 알지 못했던 때다.

절약정신이 낳은 일석삼조
18세 때 서울에서 막노동을 할 때의 이야기다.  당시는 장작으로 밥을 하던 때였다. 정주영 이사장은 한 묶음에 10전씩 하는 장작을 사서 아침 저녁으로 밥을 해먹었다. 그런데 한번 태우면 재로 변하는 장작이 너무도 아까웠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저녁에 세끼의 밥을 한꺼번에 하는 것이었다. 아침에 밥을 하면 낮에 비워두는 방을 데워놓은 꼴이 돼 그것도 낭비였다. 그래서 저녁에 하루 세끼 분량 밥을 지어서 장작 값을 아꼈고 다음날 아침밥과 점심 도시락을 미리 싸서 아랫목 이불 속에 묻어두었고 따뜻하게 잠을 잤다.

연필로 사인(Sign) 하기
정주영 이사장은 마음에 들면 볼펜으로 사인을 했으나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연필로 사인을 했다. 만약 사업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으면 보고하러 온 간부 앞에서 지우개로 사인을 지웠다.  그러면서 “내가 언제 결재를 했어”라며 화를 내곤 했다. 다소 황당한 얘기 같지만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사업 타당성을 보다 세밀히 체크하고 최선의 대책을 강구하라는 무언의 명령이기도 했다. 어느 날 한 임원이 옛 결재서류를 갖고 올라왔다. 정주영 이사장은 지우개로 박박 지우고 호통을 치려했다. 그러다가 이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한바탕 웃음을 터드리며 “당신, 괜찮은 친구야.” 했다. 그 임원은 연필로 사인한 곳에 손대지 못하도록 투명 테이프를 붙여 놓은 것이다. 그 임원은 총애를 받고 승승장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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