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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편지 마시지 말고 머금어라 강은교

오랜만에 당신께 편지를 씁니다.
거기 날씨는 어떤지요? 내가 울고불고 하면서 당신의 사진 앞에 절한 이후 세월은 참 많이도 갔지요.
그런데 그날 내가 과연 왜 울었을까요? 나는 아직도 그것이 의문입니다.
정말 오랜만이었지요. 당신이 집을 나간 지 몇 년 만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나는 그동안 당신을 상당히 미워했었는데 거기, 그 어설픈 제상 앞에 엎드리자 자동적으로 눈물과 탄식의 비명이 쏟아져 나왔었습니다.
맘껏 우는 울음을 허락받은 그 장소의 특수성 때문이었을까요? ‘마음을 없이’ 하지 못한 어리석음이 눈물에 섞여 비명으로 세상을 마구 만진 것이었을까요?
작년 이맘때엔가 썼던 저의 글을 첨부합니다. 옛날에 그랬듯 거기서 한 번 읽어주시기를.

오랜만에 그곳엘 갔다. 그곳은 언제나 조용하다. 조용한 그곳 마당에서 한 스님을 만난다.  그 스님은 날씨가 추운지 잔뜩 웅크리고 서 있다. 나는 묻는다.
“회감이 영 안 됩니다. 아무리 해도 차가 머금어 지지 않습니다. 차는 마시는 게 아니다, 머금어야 한다고 말씀 하셨는데, 그게 영 안 됩니다. 머금으려 해도 금방 넘어가 버리고 맙니다. 목구멍을 꼴깍하고 넘어가버려서 그런지, 회감하지 못한 차에선 전혀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향기가 입 속에 가득 돌아야 할 텐데, 어떻게 하면 향기가 돌게 할까요?”
“글쎄요?”
스님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심히 부끄럽지만, 다시 한 번 말한다.
“노력은 하는데요…  영 머금어지지 않아요. 어떻게 하면 머금어지겠습니까?”
“마음이 급해서 그렇습니다.”
“저는 그렇게 마음이 급하지 않은데요?”
“생각과 말이 소란스럽게 앞서서 그렇습니다.”
“저는 늘 뒤에 말없이 서있는 편이고 성품이 조용하다고 하는데요.”
“욕망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저는 욕망이 그리 많지 않은데요. 안 그래도 그동안 살다 보니까 욕망이 너무 많았던 것 같아 작년엔 집도 평수를 줄여서 이사했는데요. 그리고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오히려 욕망은 생산하는 힘이라고 하였는데요.”
“그래요? 너무 똑똑하셔서 그렇군요. 지식은 곧 지혜가 아닙니다.”
“저는 그리 똑똑하지도 않고, 지식이 높지도 않고, 아니… 저는 오히려 바보 같습니다. 남들은 항상 저보다 먼저 가지요. 저는 남들 하는 것을 영 못 따라갑니다.”
“스스로를 바보 같다고 생각해 늘 채찍질하니 그렇습니다. 마음이 화가 나 있는 것입니 다.”
“겸손한 게 아닌가요?”
“너무 겸손하니까 그렇습니다.”
“너무 겸손하다니요? 겸손할수록 좋은 게 아닙니까?”
“겸손이 ‘겸손한 체’ 하는 것을 알아버렸나 봅니다. 마음을 낮추어야지요. 말이 아니라.”
“스님, 정말 어렵습니다. 아무튼 차 향기가 입 속을 돌게 하는 무슨 요령 같은 게 없을까요?”
“허 글쎄요, 아직도 요령을 찾으시다니, ‘그저 마시면’ 됩니다. 그러나 향기를 맡아야 한다고 마음을 강요하면 향기가 올 수 없지요. 마음을 없애세요.”
“마음을 어떻게 없애지요?”
집에 돌아와 ‘마음을 없애는’ 문제에 대해 곰곰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마음이 가득 찬 사람들이 내 주변엔 너무 많구나, 나뿐 아니라. 평생 공부만 해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로부터 평생 성실히 일해 왔다고 주장하는, ‘부동산 투기 의심’의 재력가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한결같이 노력한 게 잘못이냐고 반문한다.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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