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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의 꿈과 생애 “나는 부유한 노동자일 뿐…” .

아산재단의 설립자인 정주영(鄭周永) 은 1915년 11월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소박한 농부인 부친 정봉식(鄭棒植)과 모친 한성실(韓誠實)의 6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금강산에서 멀지 않은 아산리는 50호 정도가 사는 마을로 백사장과 해당화, 소나무가 어우러진 풍광이 수려한 곳이었다. 그는 휴전선에 막혀 갈 수 없는 고향을 늘 그리워했고, 자신의 아호를 아산(峨山) 이라 지었다.
그는 6살 때부터 할아버지의 서당에서 동몽선습(童蒙先習) 명심보감(明心寶鑑) 사서삼경(四書三經) 등을 배웠다. 그리고 송전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공부를 잘해 5년 만에 졸업했다. 상급학교에 진학하여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포기하고 아버지에게 농사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흉년이 들면 조밥과 콩죽으로 겨울을 나고, 봄이면 풀뿌리 나무껍질로 보릿고개를 넘으면서 여름감자를 기다리던 궁핍한 생활이었다.
부친은 맏아들인 그가 농사일을 물려받아 많은 동생들을 거두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같은 마을의 구장 집에 배달되던 동아일보에서 춘원 이광수의 연재소설 ‘흙’을 읽으면서 다른 세상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고향에 묻혀서 농사꾼으로 살기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는 몇 번이나 가출하여 서울 인천 등지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아버지에게 붙잡혀 고향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대도시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막노동밖에 없었지만, 큰 세상으로 나가야 희망이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열심히 일한만큼 돈을 더 벌 수 있고, 조금씩 저축도 할 수 있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소원대로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는 아버지가 소를 팔아 마련한 돈 70원을 들고 마지막 가출을 했다.

한국 경제의 주춧돌을 놓다.
‘가출소년’ 정주영은 세계적인 기업인이 되었다. 1947년에 설립한 현대건설을 그는 한국 최대의 건설회사로 키웠고, 자동차와 중공업으로 세계시장을 공략했다. 그가 개척한 사업들은 모두가 한국 경제발전의 주춧돌이 되었다. 경부고속도로는 한국 근대화의 상징이 되었고, 소양강 댐은 토목기술의 신기원을 기록했으며, 사우디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해외 건설 개척의 금자탑이 되었다. 한국 최초의 승용차 고유모델 ‘포니’로 시작한 자동차 산업은 세계 시장을 사로잡았고, 현대 중공업은 세계 최대의 조선(造船) 대국을 이룩하는데 기여했다.
그는 또 서산만 간척사업으로 국토를 넓혀 대한민국 지도를 바꿨고, 88서울올림픽을 유치하는 사령탑 역할을 했고, 서산농장에서 기른 소떼를 몰고 방북하여 남북교류의 물꼬를 텄다. 그가 개척한 사업들이 하나하나 성공하면서 한국의 경제 발전사, 한국 기업의 역사가 새로 씌어졌다.
일제시대에 청년기를 보내고,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기업을 일궜던 그에게 기업의 성공이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기업의 성공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기업의 발전을 통해 국력을 신장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는 현대의 사원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사업보국’(事業報國)을 강조했다.
“현대는 단순히 장사하는 기업이 아니라 국가의 경제발전을 위해 중추적 역할을 하는 회사다. 현대그룹은 지난 50년 동안 우리 자신의 발전 뿐 아니라 한국의 경제성장을 일으키는 데 선도적 역할을 했다. 그것이 현대의 자부심이다. 나는 사업보국의 이념을 경영철학으로 삼았다”
1970년대 현대그룹에 입사한 사원들은 정주영 회장이 면접에서 “회사발전보다는 조국건설에 앞장 설 사람이 필요하다”라고 한 말에 젊은 피가 끓어올라 그런 정신으로 일했다고 입을 모은다.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며 통일을 염원해 온 그는 1989년 1월 국내 기업인으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금강산 남북공동개발 의정서’를 체결했고, 1998년 10월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금강산 개발구상에 합의했다. 1998년 6월16일 소떼를 몰고 휴전선을 넘어 방북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강원도 통천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청운의 뜻을 품고 가출할 때 나는 아버님이 소를 판돈 70원을 가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이제 그 한 마리의 소가 1,001마리가 되어 그 빚을 갚으러 고향산천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어려운 이웃’을 돕는 재단
“사람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병고와 가난입니다. 그 두 가지는 악순환을 일으킵니다. 병치레 때문에 가난해지고 가난하기 때문에 제대로 병을 치료하지 못해 병이 깊어집니다. 현대는 그 동안 건강하고 유능한 수많은 사람들의 힘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현대의 재산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쓰고 싶다는 것이 나의 오랜 소망이었습니다.”
1977년 7월1일 정 회장은 아산재단 설립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개인 소유인 현대건설 주식의 절반을 재단에 출연하고, 매년 배당될 이익금 50억원을 사회복지사업에 쓰겠다고 약속했다. 아산재단은 농어촌의 의료취약지역에 첨단시설을 갖춘 종합병원을 설립하여 지역주민들이 현대의학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사회사업단체들을 지원하고, 근로자 등 어려운 가정의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학문연구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재단설립 당시인 1970년대에는 우리나라 의료기관의 80%가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었다. 농어촌 주민들은 몸이 아파도 제대로 치료 받기 어려웠고, 큰 병이 나면 대도시 병원으로 갈 엄두를 못 내어 치료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 아산재단은 설립 두 달 만에 전북 정읍에서 병원 기공식을 가진데 이어 전남 보성, 강원 인제, 충남 보령, 경북 영덕 등 5곳에 100억원을 들여 종합병원을 설립했다.
재단은 현재 서울아산병원을 비롯, 강릉 정읍 보령 보성 홍천 영덕 서울 금강 등 8개의 병원과 아산 생명과학연구소 등을 갖춘 국내 최대의 의료기관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1988년에 개원한 서울아산병원은 이들 지방병원의 모병원 역할을 하는 한편 국내 최초, 세계 최초의 의학신기술을 쏟아내며 최고의 병원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첨단의학의 결정체인 장기이식 분야에서 서울아산병원은 세계 최고수준이다. 뇌사자 간이식 수술 99%, 생체 부분 간이식 96%, 심장이식 99% 등의 높은 성공률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세계 어느 병원보다 높은 수준이다. 또 혁신형 암 연구 중심병원, 항생제 처방률이 가장 낮은 병원,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병원, 암수술을 가장 많이 하고 성공률이 높은 병원 등으로 뽑히면서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얻고 있다.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무료진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평생 무료진료, 의료취약지구 순회무료진료 등 지난 12년간 18만 명에게 무료진료를 했고, 진료비 액수로는 158억원에 이른다.



정주영 회장은 1982년 5월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명예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기념 만찬석상에서 연설하며 이런 말을 했다.
“…남들은 나를 세계수준의 대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기업인이라고 평가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스스로를 자본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며 노동을 해서 재화(財貨)를 생산해 내는 사람일 뿐 입니다…”
그의 말 속에는 노동자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대기업인의 자부심과 함께 노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려운 사정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는 아산재단 설립으로 그 약속을 지켰다.
오래 소망하던 복지재단을 설립함으로써 그는 ‘부유하고 행복한 노동자’가 되었다. 그는 세계를 무대로 뛰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아산재단의 거의 모든 행사에 참여했으며, 명절이 오면 사회복지시설의 어린이들과 시설 종사자들을 초청해 잔치를 열어주었다. ‘회장 할아버지’는 어린이들과 똑 같은 종이고깔 모자를 쓰고 함께 춤추고 노래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돈을 아끼지 말아라.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정성껏 치료해 줘라. 병치레 때문에 가난해지고, 가난해서 병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돼서는 안 된다. 시골에 사는 죄로 현대의학의 혜택을 못 입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무료진료를 늘려라. 병원에 오는 환자뿐 아니라 병원에 올 수 없는 환자들을 찾아가서 치료해줄 수 있어야 한다.” 라고 그는 재단과 병원의 직원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그는 2000년 5월31일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다음해 3월21일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겼고, 세계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뒤축을 몇 번씩 갈아 신었던 낡은 구두, 구멍을 기운 양말, 빛바랜 셔츠와 양복, 시중에선 찾아볼 수도 없는 구식 라디오 등 그가 남긴 검소한 생활의 흔적들이 시중의 화제가 되었다.
“몇 백 년이 흐른 후에도 아산재단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과 희망을 주는 최고의 복지재단으로 발전하기 바란다.” 는 것이 그의 마지막 소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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