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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영원한 별리(別離)’를 넘어 ‘신의 축복’으로 정진홍

죽음의 필연성과 공포를 아울러 넘어서는 가장 좋은 길
인간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좀 어폐가 있을지 몰라도 사람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뚜렷하게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어떤 것이라는 사실도 사람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단절, 더 이상 아무 것도 없음, 절망, 모든 것의 소멸, 영원한 별리(別離) 등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죽음 정서의 내용들입니다. 인간은 죽음이 그러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두려워한다 하더라도 죽음은 필지(必至)의 사실입니다. 아예 생명이 아니었으면 죽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있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죽음을 불가피하게 맞을 수밖에 없는 필연과 죽음을 회피하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깊은 곤혹스러움과 아픔을 겪게 됩니다. 죽되 좀더 있다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장수에 대한 희구를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래 사는 일은 인간이 가지는 절실한 꿈입니다. 그렇게 오래 살다 죽으면 그 죽음은 당연한 죽음이기 때문에 한이 맺힐 까닭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장수하면서 맞는 죽음은 우리가 담담하게 또 의연하게 맞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장수는 죽음의 필연성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아울러 넘어서는 가장 좋은 길이라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죽음관을 보면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그리 심하지 않았던 듯합니다. 다시 말하면 천수를 다하고 죽는 것, 충분히 장수하고 온몸이 쇠잔해지면서 서서히 몸의 굴레를 벗는 듯 죽음에 이르는 일은 오히려 ‘축복’이라고 일컬었습니다. 두려워한 죽음은 요사(夭死), 객사(客死), 횡사(橫死), 원사(寃死) 등 이른바 자연스럽지 않은 죽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세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의술이 발달하고 식생활이 상상할 수 없이 향상되었고, 사회구조도 더 근원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보살피는 쪽으로 발전해 가고 있어 인간의 수명은 백세를 넘어설 것이 분명한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여전히 죽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죽음이 충분히 유예되면서 삶을 이전보다 더 많이 더 길게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휴식, 그리고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새로움과 만나는 일
하지만 더 오래 살게 된 것이 죽음을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듯이 장수가 더 이상 늙지 않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는 늙어가고 있고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수명이 길어진다고 하는 것은 젊음이 연장된다거나 활발한 장년의 생활이 확장된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늙음의 기간이 확대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늙음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몸이 아울러 이전의 생애와는 달리 나약해지고 퇴행하고 힘들어진 상태를 일컫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수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실제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고통의 연장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길어진 수명, 또는 연장된 늙음이 몸과 마음의 아픔이나 일그러짐의 지속이 아니라면 사정은 전혀 달라집니다. 비록 젊음의 패기나 장년의 기개를 유지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제까지 그러한 생애를 지내며 겪지 못한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전에 지니지 못했던 그윽한 마음의 평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욕심에 매여 자기를 잃고 살아가던 그러한 삶으로부터도 놓여날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과 착함을 새삼 느끼고 발견할 수 있으며, 삶의 삶다움이 무언지도 차근차근 그리고 조용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모든 것이, 귀하게 여겨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여유를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노년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세월이야말로 더할 수 없이 행복한 기간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휴식의 기간이기도 합니다. 한평생 피곤하고 상처받고 지친 삶이 따뜻하고 포근한 안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만약 몸이 여전히 건강하다면 이제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실천할 수 없었던 자기의 꿈을 실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까지 하지 않던 다른 일일 수도 있고, 반드시 일은 아니라 할지라도 자기의 삶의 스타일을 바꾸어 보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휴식, 그리고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새로움과 만나는 일, 그러면서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혜와 너그러움과 평안한 미소와 늙음이 마련하는 신비한 권위를 베풀 수 있게 되는 삶, 이에 이르면 비로소 우리는 감히 장수는 신의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노년을 신의 축복으로 만드는 일은 신에게 부탁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 건강해야 하고, 절제 있는 삶을 살아야 하며, 노년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젊은 시절에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가족들과의 관계도 근원적으로 따뜻하게 유지해 왔어야 가능한 현실이고, 사회적인 역할도 바르고 맑고 의연했을 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신은 인간이 스스로 책임 주체가 될 때 바로 그러한 사람을 축복하지 결코 노예적으로 신에게 의존하면서 맹목적으로 장수만을 바라는 그러한 사람에게 무조건 축복을 주는 분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혹 그렇지 않은데 장수를 누릴 수 있다 할지라도 어쩌면 그것은 괴로움이나 고통의 연장일는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사람의 수명은 길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장수는 축복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스스로 늘어난 생명을 축복으로 만들어내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축복 여부는 신이 결정하는 일이 아닌 듯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결정하는 일입니다. 신을 배제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언제 죽든 그것은 신의 일이겠지만 그때까지 지속하는 삶의 질은 결국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무쪼록 늘어난 생명으로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휴식, 그리고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새로움과 만나는 일, 그러면서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혜와 너그러움과 평안한 미소와 늙음이 마련하는 신비한 권위를 베풀 수 있게 되는 삶, 이에 이르면 비로소 우리는 감히 장수는 신의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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