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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사 서른 살의 자각 희망의 등불 다시 밝힙니다. 정몽준

아산재단 창립 30주년을 맞았습니다.
오백년이나 천년을 단위로 하는 역사에 비하면 30년이란 감히 세월이라 할 수도 없을 만큼 짧습니다. 하지만 한 아기가 태어나 이제 서른의 나이가 되었다면 그 세월은 결코 짧지 않습니다. 아기는 어른이 되고 낳은 부모는 노인이 되는 그런 세월이기 때문입니다.
아산재단은 제 선친이신 아산 정주영님께서 세우셨습니다. 그런지 서른 해가 지났습니다. 바로 이 세월의 마디에서 저는 새삼 아버님의 그 때 그 꿈을 되새기게 됩니다. 왜,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위해, 이 일을 시작하셨을까 하는 물음을 스스로 물어보게 되고, 그것이 지금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도 살피게 됩니다.

그런데 제 물음에 대한 대답은 어쩌면 자명합니다. 선친께서 재단을 창립하시면서 스스로 말씀하신 것도 전해지고 있고, 문서로 된 것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면 ‘우리 사회의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하여 한 성공한 기업인이 자신이 벌어들인 많은 돈을 사회에 환원한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했고, 다른 기업들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앞장서서 그런 결단을 내린 것은 훌륭한 일이라고 칭송하기도 했습니다. 고마운 평가들입니다. 재단은 훌륭하게 서른 해를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제 마음 속에 뚜렷하게 각인되는 선친의 말씀이 있습니다. 당신께서 스스로 ‘나는 부유한 노동자’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아버님은 스스로 그렇게 사셨습니다. 가난은 그 분의 삶이었습니다. 산을 밭으로 일구며 농사를 지었고, 공사장을 전전하면서 노동을 했고, 쌀가게 배달원으로, 자동차 수리공으로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중소기업을 거쳐 세계적인 대기업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든지 기업가의 윤리라든지 하는 의식을 가지고 그 어른께서 이 재단을 창립하셨다고 이야기한다면, 결과적으로 그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기업의 사회적 책무란 일단 기업이 성공하고 나서 다음 단계로 수행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러한 덕목은 단지 기업을 의미있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부수적인 것일 뿐 진정한 것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가지고 계셨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성공 이후의 과제가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동기가 부(富)를 일구게 했고, 그것이 기업의 목표고 존재의미라는 사실을 이미 부 자체에 담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버님에게  사회복지재단의 설립은 그 어른에게는 성공에서 비롯된 의도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아산재단은 설립자의 뜻을 받들어 열심히 일해왔습니다. 병원이 없어 몸이 아파도 치료를 받을 수 없었던 농어촌 벽지 주민들이 현대의학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썼으며,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가 따뜻한 도움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학문연구에 정진하는 학자들을 지원하고, 가난하여 교육받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희망의 불을 지피는 사업을 꾸준히 전개해 왔습니다.

사회 각계각층의 많은 분들이 재단의 뜻에 공감하고 이 일을 실천하는 데 참여해 주셨습니다. 그 분들의 협조와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확인하듯 이 재단이 이처럼 성숙한 모습으로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그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요즘 저는 선친께서 ‘나는 부유한 노동자’라고 하신 말씀의 뜻을 헤아려 봅니다. 저는 가난의 문제를 알지만, 가난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한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부자가 되어갔는지, 그 부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일상의 삶을 통해 그 과정을 공부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제가 살아온 모습이, 또 아산재단 30년이 선친의 마음에 어떻게 비쳐질지 스스로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른 해는 그렇게 해야 하는 당연한 세월의 마디인 듯합니다.

30년 전과 지금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사회구조가 달라졌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도 달라졌고, 의미나 가치도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세계에도, 자연에도, 급격한 변화가 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설립자께서 의도하신 ‘가난에 대한 가난한 자의 도전’이라는 설립이념이 달라질 까닭은 없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가치입니다. ‘가난을 함께 고통하고, 가난으로부터 함께 벗어나 모두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변하는 인간의 인간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시대적 변화를 감안한 창조적 모색은 살아있는 제도와 조직이 수행해야 할 당연한 과제이고 윤리입니다. 저는 재단 창립 30주년이 이러한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는 더할 수 없이 좋은 마디라고 생각합니다. 성인의 세월인 서른 해는 우리들에게 무한한 창조력과 상상력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깁니다.

그 동안 아산재단을 일구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거듭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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