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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산책 투박한 원석에서 '보물'을 찾다 오윤현

투박한 원석에서 보물을 찾다

서울 상도동 중앙대 후문 옆. 트럭 한 대가 겨우 다닐만한 골목에 들어서자, 고동색 한복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옥장(玉匠) 엄익평(50) 선생이 마중을 나왔다. 그를 따라 계단에 올라 철문을 열자 보자기만한 마당에 햇살이 가득했다. 마당 바닥에 삐죽 뾰족한 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엄 옥장이 그 돌을 가리키며 “이 건 공작석, 저건 휘석(輝石)과 청금석” 하며 일러주는데, 미안하게도 문외한의 눈에는 그저 얼룩덜룩한 돌로만 보였다.

마당 한쪽 허름한 작업실에 들어서자 엄 옥장의 설명이 길어졌다. “몇 해 전까지 이곳에서 일했어요. 여기 있는 공구들로 옥을 자르고, 갈고, 다듬었죠.” 그가 가리키는 공구 중에는 재봉틀처럼 생긴 것(발비비개:옥을 고정시켜 갈거나, 깎거나 광을 낼 때 쓰던 도구)도 있고, 활처럼 생긴 것(활비비:옥에 구멍을 뚫는 도구)도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만으로는 쉽게 이 공구들로 어떻게 옥을 깎아 아름다운 향로나 옥비녀(옥잠) 등을 만드는지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다.

궁금증은 이내 풀렸다. 옛 작업실 반대쪽 지하로 들어서자, 그의 요즘 공방이 나타났다. 공방은 각종 공구들로 어수선했다. 그가 시범삼아 모터를 돌리자 못처럼 생긴 옥 물레가 징징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옥 덩어리를 거기에 대자 신기하게도 옥이 조금씩 닳아 사라졌다. 옥 물레 위에 연결된 가느다란 ‘호스’에서 물이 똑똑 떨어져 물레에 닿았다. “옥과 기기가 마찰하면서 생기는 열을 식히려 뿌리는 물입니다”라고 엄 옥장은 설명했다.

그는 작은 당목태톱으로 옥을 자르는 시범도 보였다. 옥을 고정시키고 밀가루처럼 가는 연마제를 뿌려가며 톱질을 하자, 신기하게도 옥이 사과처럼 갈라졌다. 또 하나 신기한 것은 다양한 기구들의 모양이었다. 하나같이 치과에서 쓰는 기구랑 비슷했다. 게다가 소리까지 어금지금했다. 이유가 있었다. 옥공예 공구 대부분이 치과 기구를 응용한 탓이었다.

그는 하루 종일 이 비좁고 어두운 공방에 앉아 투박한 원석을 자르고 갈아 옥가락지, 옥 향로 같은 20여 가지 ‘보석’을 만든다. 일은 지루하고 고되다. 쌍가락지 하나를 만드는 데 일주일이 꼬박 걸릴 정도이다. 작업은 크게 네 공정으로 이루어진다. 옥 덩어리를 자르는 단절(톱질), 옥을 다듬는 갈기, 구멍을 뚫는 천공, 빛을 내는 광택이 그것이다. 공방 한쪽에 있는 옥과 거북이 등껍질(대모갑), 물소 뿔(흑각), 주황색 호박, 산호, 비취옥 등은 그가 주로 사용하는 재료이다.  

집안 유리장 안에는 그같이 귀한 재료로 만든 섬세하고 고운 공예품이 즐비했다. 특히 비취로 만든 비녀들이 신비스러웠다. 허브 비누처럼 생긴 호박으로 만든 브로치도 보면 볼수록 만지고 싶었다. 흑갑과 대모갑으로 만든 풍잠(갓 고정대)이나 동곳(상투를 틀 때 기둥 역할을 하는 꼬리)은 처음 보는 것들이라 진기했다.

슬쩍 엄 옥장의 손을 보니 중치 붕어처럼 작고 두툼했다. 이 산뜻하고 미려한 작품들을 저 투박한 손으로 일일이 깎아 만들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36년간 옥 하나만을 바라기하다
옥을 매만진 지 어언 36년. 이제는 옥을 떡 주무르듯이 하지만 처음에는 달랐다. “무조건 그럴 듯하게 깎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라고 그는 돌이켰다. 옥공예에 뛰어든 것은 중학교 2학년을 막 중퇴하고 났을 때였다. 논산에서 가난하지만 화목한 가정에서 살았다. 그러나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별안간 돌아가시면서 집안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어머니 혼자 9남매(그는 여섯 번째다)를 키워보지만 역부족이었다. 1년 뒤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을 앞세우고 무작정 상경했다.
가난했지만 익평은 팔랑개비처럼 늘 활기찬 아이였다. 선린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축구와 공작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는 명랑 소년이었다. 하지만 가세가 더 기울자 중학교 2학년 때 스스로 자퇴한다. 한 푼이라도 벌어 살림에 보태겠다는 효심의 발로였다. 그때 둘째형 친구 홍종호 씨가 손을 내밀었다. 홍씨는 나무 조각과 돌을 깎아 기물을 만드는 데 탁월한 재주를 지닌 장인이었다. 어린 익평은 그의 수하에서 옥공예 기술을 하나둘 배워나갔다. “운이 좋았다. 마침 내가 일을 배울 무렵(1970년께)에 춘천에서 옥이 발견되어, 명맥만 유지되던 옥공예가 다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익평은 자신의 손재주에 예술 감각이 더해질 때마다 행복했다. 망부석처럼 작업대에 앉아 일하던 어느 날, 그는 돌연 독립을 선언한다. 스승이 다른 일로 전업을 하자 아예 자신의 공방을 낸 것이다. 나이 열아홉 살 때였다. 집 근처에 버려진 원두막을 개수해 공방을 만들자, 많은 사람이 웃음을 터트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공방에서 무슨 작품이 나올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공방을 갖게 되었다는 자부심에 그의 손에는 신바람이 일었다. 독립 두 달 뒤에는 활석 사자 향로를 본떠서 백옥 향로를 만들어보았다. 만곡(彎曲)진 향로의 내부를 탁마(琢磨)하는 공구를 직접 만들어가며 고생한 끝에 드디어 정교한 백옥 향로를 완성했다. 향로가 마중물 노릇을 한 것일까. 그 뒤 일감이 늘면서 그의 공방은 식구가 여섯 명으로 늘어났다. 군 제대 뒤 다시 천직으로 돌아온 그는 바위처럼 앉아 원석을 연마했다.
‘나 홀로 연구’도 꾸준히 했다. 전통 문양집을 보며 옥공예에 어울릴 법한 문양을 골라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직접 응용한 것이다. 시장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힘을 얻어 십장생 등도 적극 작품에 끌어들였다. 그같은 노력 덕에 그의 작품은 1989년부터 각종 ‘공예품대회’에서 호평을 받는다. 공예대전에서는 문화부장관상, 문화재위원장상, 국무총리상 등을 받았다. 2006년, 서울시는 그를 서울시 지정 무형문화재 36호(옥 조각)로 지정했다. 

옥의 내면에 생명력이 있다
100여 년 전만 해도 옥의 가치는 대단했다. 그 옛날 황제들의 도장 재료가 옥인 것도 우연은 아니다. 군자필패옥이라는 말도 있었다. 군자는 반드시 옥을 지녀야 한다는 말이다. 옥의 내면에 생명력이 있다고 믿고, 그것이 건강과 영혼에 맑은 영향을 미친다고 믿은 것이다. 엄 옥장은 옥의 아름다움을 구색십삼채(9色13彩)에서 찾았다. 옥과 다양한 보석을 다듬으며 만나는 푸른 이끼 같은 청색, 물총새 날개 같은 녹색, 삶은 밤 같은 황색, 피멍 같은 자색, 먹빛 같은 흑색, 비계를 잘라놓은 듯한 백색 등이 인생을 아름답게 여기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요즘도 그는 어수선한 공방에서 다양한 원석을 들여다보며 심사숙고한다. 얼룩덜룩하고 삐뚤빼뚤한 자연석으로 무엇을 만들지 크기, 질, 색상 등을 고루 살피는 것이다. 36년 돌만 만진 장인답게 그는 “눈을 맞추면 감이 딱 온다”라고 말했다. 그 감을 그는 지금 조카에게 전수하고 있다. 두 장인이 공들여 만든 산뜻한 작품은 그의 아내가 운영하는 가원공방에 가면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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