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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그대가 되어 "필요해서 사랑해요" 이인영

필요해서 사랑해요

양천구 목동의 미혼 가장 장명선(50) 씨를 만나러 가는 날. 태풍 모라꼿의 영향으로 여름비가 내렸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좁아 담과 건물 사이에 우산이 두두둑 소리를 내며 낀다. 우산을 접고 비를 맞기로 작정하니 오히려 편하다. 2층에 오르니 장독들이 비좁은 공간에 일자로 놓여있다. 넓은 장독대의 장독보다 더 소중하고 신통해 보이는 장독. 그 위로 비가 쏟아진다. 방 두 칸 집엔 어머니께 ‘사랑의 자리’를 마련해드린 장명선 씨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있다.
“안녕하세요~! ” 그의 조카지만 딸과 다름없는 초등학교 4학년 막내 서희가 인사를 하며 반긴다. 대문 앞에서 기다리더니 호기심을 보이며 어느 틈에 올라온 아이다. 고2 둘째 은빈이도 공부를 하다말고 일어나 인사를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스로 돈 벌어 대학가겠다며 아르바이트 하는 큰 조카딸만 집에 없다. 안방 침대에선 어린 아기가 다 된 어머니가 천진한 눈을 맞추더니 입을 떼신다. “미안해…”
좁은 길을 통해 만난 그의 가족들. 공기청정기 때문인지 집은 뽀송뽀송하고 조카딸들과 알츠하이머 병을 앓고 계신 어머니는 맑다. 장명선 씨는 그들 모두의 엄마다.

바르게 살고 싶던 어머니와 딸
어머니(83)는 전남 고흥의 알아주는 부잣집 딸로 자랐지만 6.25전쟁의 상처를 고스란히 받았다. 교육자인 전 남편은 동란 중 행방불명됐다. 재혼한 남편(부친)도 전쟁 부상자로 상처의 골이 깊었는지 가정을 돌보지 않았고 별거 후 소식이 끊겼다. 어려움 속에서도 2남 2녀의 자녀만큼은 반듯하게 기르고자 애쓰셨던 어머니. 한 여름에도 민소매를 안 입었을 정도로 얌전하시던 어머니도 병마 앞에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30년 전인 1979년 류마티스 관절염과 디스크에 걸려 일을 못하게 되고, 1996년 뇌종양, 2003년부터는 알츠하이머 병까지 걸리셨다. 저절로 맏딸인 그가 가장노릇을 하게 된 것은 인쇄소에 다니던 24세의 아가씨 때부터다.
설상가상으로 형편이 나빠진 여동생 딸 셋까지 맡아 양육하게 되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화벨이 울리면 무의식중에도 받듯이, 필요에 의해 이런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어요.” 말하는 장명선 씨. 그가 말하는 ‘필요’가 ‘사랑’이었음을 본인은 모르나 보다.
장명선 씨는 고교 졸업 후 직장생활 하면서도 ‘난지도 어린이집’ 봉사를 한 4년 다녔었다. 그곳 엄마 한 분이 6학년짜리 딸이 무식하다고 했다며 서럽게 우는 걸 보고 같이 다니던 언니하고 열었던 ‘야학’은 집안 사정으로 끝났다. 그 후 난지도 야학은 수색성당 청년들이 맡아 돌보았다고 하는데 난지도 시대가 마감되는 바람에 막을 내렸다. 그 무렵 다니던 ‘두엄자리양로원’에는 지금도 일 년에 한두 번 서희를 데리고 가 놀다 온다. 
“결혼하자던 남성도 있었지만, 믿을만한 남성이 없었어요” 하며 웃는다. 3살 아기이던 막내는 초등학생이 되어 따라다니고, 어머니는 에어컨이 돌아가는 방의 정갈한 침대 위에서 코를 골며 주무시고 계시다.

학원비가 제일 힘든 이모
“이모, 이모. 할머니가 춥대. 나도 추워, 덮어줘.”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서희가 좋아하는 할머니 곁에 누워 이모의 손길을 기대한다. 그가 일어나서 어머니 배에는 수건 하나를 더 덮고, 이불로 어머니와 조카를 함께 다독거린다.
어머니는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손녀와 함께 잠에 빠졌지만, 장명선 씨는 “한 3일만 꼼짝도 안 하고 푹 잠만 잤으면 좋겠어요” 하고 말할 정도로 잠이 부족하다. 한밤에도 1~2시간 간격으로 일어나 어머니를 살피다 선잠을 잔다.
아이들에겐 규칙적인 생활을 가르친다. 생활이 불규칙하면 안정을 찾기 어렵다고 믿는다. 조카들 기상 시간은 5시 30분, 취침은 9시 30분이다. 그는 집안일을 하고 친척이 운영하는 인쇄소에는 11시나 12시쯤 출근해 반나절 근무를 하고, 부리나케 퇴근해 저녁을 준비한다. “우리 엄마 2시간만 봐주세요. 안 되면 1시간만이라도 봐 주세요” 부탁하곤 했다. “주변 분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하는데 눈가에 물기가 밴다. 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엄마를 두고 직장에 갈 수가 없다. 소규모 인쇄소에서 사정을 봐준다 해도 출근조차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월급 80만원을 받아 다섯 가족의 생계비로 써야 하는 절박감에 도움을 청하곤 했다. 다행히 작년 8월부터 요양보호사가 12시부터 하루 4시간씩 어머니를 돌봐줘 얼마나 마음이 편해졌는지 모른다. 생활비는 여동생이 주는 70만원, 기초생활수급비 35만원을 합해 쓰는데 월세가 올라 30만원을 제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도 아이들은 잘 자랐다. 하지만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싶은 둘째 조카 미술학원비 못 대줄 때 가난하다는 걸 가장 뼈아프게 느낀다.

“우리 할머니인 걸요”
“저는 불편함 없어요.” 그에게는 그가 없나 보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도 큰 불편함이 있다. 지병인 신경섬유종. 커지거나 하면 수술해야 하는 난치병이다. 20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 12월 팔에 있는 종양 중 하나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등에 있는 건 수술하지 못한다. 어머니를 들쳐 메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시신경 뒤쪽에 생긴 종양도 약간씩 자라나 지켜보고 있다. 그래도 종양의 사이즈가 작아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이모를 보고 그대로 배웠다. 쓸어주고 닦아주고 안아주면 좋아하시는 할머니 침대에 올라 함께 뒹굴며, 할머니 품에 파고들곤 한다. 둘째는 학교에서 돌아와 이모처럼 할머니를 어깨에 들쳐 메고 화장실로 간다. 하루에 대여섯 차례 모시고 다니며 한 번씩 목욕도 시켜드린다. “우리 할머니인 걸요. 냄새나면 사람들이 싫어하잖아요” 하는 둘째다.
현관 바로 왼쪽에 있는 가스레인지 위엔 뚜껑이 없어진 주전자가 반질반질 닦여 있고, 오른쪽엔 막내의 분홍 비옷이 잘 준비되어 있다. 냉장고에 ‘유괴예방교육 꼭 기억하세요’란 글이 눈에 띄는 곳에 붙어 있는 그들의 집. 건넌방에서 서희가 영어책을 낭랑하게 읽다가  이모가 외출하려 하자 언제 공부를 끝냈는지 큰 소리로 조른다. “이모, 이모~!  케이크 잘라주고 가~! ”
방 창틀엔 화초가 밖의 비를 배경으로 푸른색을 자랑하고, 곁엔 바람에 흔들리며 오뚝이 인형이 ‘날 쓰러뜨려봐라’ 하는 듯 재롱을 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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