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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삶 | 서울아산병원 체험수기 공모 대상작 신에게 선택받은 엄마들 민미란

신에게 선택받은 엄마들

하늘에서 아기를 줄 때는 엄격하게 심사한다고 합니다.
아기가 아파도 끝까지 지켜줄 수 있는 엄마인지를요.
그러니까 아픈 아기를 둔 엄마들은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저는 최면을 겁니다. 나는 신에게 선택받은 엄마라고.

마흔 살이 다 되어 낳은 아들 성아는 복잡 기형인 선천성 심장병이다. 그러다 보니 지난 12년이란 세월을 거의 서울아산병원만 오가며 살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평생을 그렇게 살겠지.
성아는 1995년 6월 21일 9시 53분에 태어나자마자 정상인의 반도 안 되는 산소 수치와 심한 황달, 비정상적인 호흡으로 인큐베이터로 직행했다. 경기도 평택, 동네 병원 의사 선생님이 아기의 심장상태가 이상하다며 소견서를 써줄 테니 서울아산병원으로 가라고 했을 때, 그때만 해도 우리에게 그렇게 엄청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온몸이 새파랗고 움직임조차 거의 없는 성아를 품에 안은 채 서울로 가며 제발 큰 병이 아니기만 빌었다.
 마침내 서울에 와 여러 가지 검사와 진찰을 마치고 드디어 만난 담당 의사 선생님의 첫 말은 “아기 상태가 너무 심각해 사망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선생님이 어찌나 밉던지. 선생님 잘못도 아닌데…. 이렇게 크고 시설도 초현대식인 병원에서, 외국 가서 공부 많이 한 의사 선생님들이 왜 내 아이를 못 고치느냐고 눈물콧물 범벅이 되어 울부짖었다.
“선생님, 내 새끼 살려 주세요!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나요? ”
아기가 너무 작아 당장은 수술할 수가 없고, 조금이라도 더 커야 성공 확률이 높다는 말에 성아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보호자는 어디 가지 말고 항상 대기실에서 대기하고 계세요.”
그 말이 어찌나 무섭던지. 성아를 들여보내고 중환자실 앞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대성통곡하는 사이 남편도 벽에 기대 주먹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닦고 있었다.

겹쳐서 생기던 불행
중환자실 대기실에서 아픈 아기를 둔 다른 엄마들을 만날 수 있었고, 우리는 하루 세 번 면회시간만 기다리며 함께 그곳에 있었다. 아기 상태가 나빠지면 물 한 모금, 밥 한 숟가락 못 넘기던 엄마들. 그럴 때면 엄마가 쓰러지면 아기는 누가 돌보냐고, 그럴수록 더 먹고 힘내야 한다고, 물에 밥을 말아 강제로 서로 먹여 주고, 그러면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방울과 함께 밥을 넘기던 그곳. 그때 어떤 엄마가 이런 말을 했다.
“하늘에서 아기를 점지할 때 땅에 있는 엄마들을 엄격하게 심사해서 아픈 아기를 주어도 꼭 지켜 줄 수 있는 엄마에게만 아픈 아기를 주신다고 해요. 그러니까 우리는 신에게 선택받은 대단한 엄마들이예요.”
그래서 난 나에게 최면을 건다. 그냥 있으면 미칠 것만 같으니까. 그래, 난 신에게 선택받은 엄마다. 어떤 힘든 일이 닥쳐도 끝까지 우리 아기를 지켜 줘야 하는 선택받은 엄마.
하루 세 번 면회 시간은 왜 그리도 더디게 오는지. 언제나 제일 앞에 섰다가 중환자실 문이 열리면 1초라도 빨리 들어가 보려고 아기가 있는 곳을 향해 뛰었다. 아기보다 더 몸집이 큰 기계들과 수많은 주삿바늘…. 중환자실 간호사들이 나를 보고 웃으면 직감으로 알았다. 아, 별일 없었구나. 그러나 간호사 얼굴이 굳어 있으면 설명도 듣기 전에 가슴부터 덜컥 내려앉았다.
“조심조심 만져 보셔도 돼요. 아기한테 이야기 좀 해 주세요. 다 들어요.”
얼마나 안아보고 싶은지, 얼마나 만져보고 싶은지 그 마음을 간호사들은 아는 것이다. 건강한 아기들에겐 별것도 아닌 일이 우리에겐 너무나 해보고 싶은 일이라는 것을.
마침내 수술을 받은 성아는 살아서 병실로 옮겨졌다.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아기가 수술 후 힘도 생겼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지만 성아를 보살피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성아는 눕히기만 하면 악을 쓰고 울어댔고, 그럴 때마다 나는 우는 아이를 안고 함께 울면서 병원 구석구석을 헤매고 다녔다. 그렇게 수많은 고비를 넘기고 우리는 퇴원했지만 몇 번의 재입원, 몇 번의 수술이 이어졌다. 성아의 몸에는 괴기 영화에나 나올 법한 수술 상처가 하나둘 늘어갔다.
그때 친정아버지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성아가 태어났을 무렵 골수성 백혈병으로 입원해서 3년 가까이 투병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내 자식 돌본다고 3년 동안 딱 한 번밖에 가 뵙지 못한 이 자식을 얼마나 그리워하며 원망하셨을까. 얼마나 이 자식이 보고 싶어 가슴 저리셨을까. 

실패로 끝난 자살 기도
“아버지 미안해. 나 참 나쁜 딸이지. 나 그동안 너무 힘들어서 그랬어. 정말 미안해.”
아버지는 보고 싶은 사람을 못 봐서 눈도 못 감고 돌아가셨다고 했다. 누군가 “미란이 아버지, 미란이 왔어요” 하고 내 손을 잡아다 아버지 두 눈을 쓸어내리자 눈이 스르르 감겼다. 나는 아버지에게 “나 나쁜 딸 만들지 말고 빨리 다시 살아나라”고 아버지를 잡아 흔들며 악을 썼다.
아버지를 땅속에 묻던 날 “아버지 나도 데리고 가. 나도 아버지 따라갈래! ” 관을 붙잡고 매달려 울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엄마를 애타게 기다리는 성아에게로 돌아와야만 했다.
힘든 생활의 연속. 엉망진창이 된 생활. 잠도 안 자고 매일 울어대는 성아한테 매달리느라 남편마저 직장을 포기했다. 나보다 어린 남편은 점점 지쳐 가고 있었다. 남편의 귀가시간은 점점 늦어졌고, 아예 안 들어오는 날도 늘어갔다.
새벽에 들어와서는 담배 냄새에 찌든 옷을 그냥 입은 채 쪼그리고 자다가 다시 나가곤 했다. 웃음도 사라졌고, 말수도 줄었다. 마치 인생을 포기하고 사는 것 같기에 수소문을 해보니 친구들과 어울려 노름을 하고, 여자도 있다고 했다. 그 착하고 정 많던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기가 막혀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그 여자를 만나 성아 이야기를 솔직하게 했다. 그 여자는 그런 사정이 있는 줄 몰랐다고, 미안하다며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아무 감정도 느낌도 없었다. 터벅터벅 걸어 집으로 향하며 나도 도망가고 싶었다.
‘이렇게 힘들게 살면 뭐하나. 나도 성아랑 이제 그만 힘든 이 세상 놓아 버리자.’
장마철이라 비가 퍼붓고, 냇가에는 시뻘건 흙탕물이 온 세상을 다 쓸어갈 기세로 흐르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성아를 안았다. 유서도 써 놓았다. 택시를 불러 타고 근처에서 제일 큰 냇가로 가자고 했다. “비가 쏟아지는데 애를 데리고 거기는 왜 가느냐? ”고 기사 아저씨가 물었지만 나는 말없이 어두운 창밖만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성아를 꼭 안고 엄청난 물살이 흐르는 둑으로 올라섰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살이가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악을 쓰고 우는 성아를 꼭 끌어안았다. 차가운 빗물이 뜨거운 눈물을 닦아 내리고 있었다.
“성아야, 세상에 태어나서 못난 엄마 만나 아프기만 하다 가는구나.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다음 세상에 꼭 다시 엄마의 건강한 아들로 태어나줘. 그때는 웃으면서 우리 행복하게 살자.” 
그때 누군가 성아를 휙 낚아채더니 내 머리채를 쥐고 끌어올렸다. 돌아보니 기사 아저씨였다. 아무래도 이상해 쫓아왔다고 했다. 아저씨는 우리 모자를 다시 집에다 데려다 주고 가면서 “애기 엄마 힘내요”라며 힘을 실어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감사하고 고마운 아저씨다.

9시간 동안의 대수술
이후 병원을 제집 드나들 듯하며 살면서도 성아에게 많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서 아이를 휠체어에 태우고 학원으로, 학교로, 놀이터로 끌고 다녔다. 119는 단골이 됐고, 산소통을 거의 달고 살았다.
그때 병원에서 이 상태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마지막으로 폰탄 수술(선천적으로 심실 하나가 기능을 하지 못할 경우 그 기능을 살리는 수술로서, 일반적으로 세 번의 수술을 거쳐야 한다)을 하자고 제의했다. 망설였다. 수술을 하다 죽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반면에 수술이 잘 되면 지금보다 숨쉬기도 편하고 걸을 수도 있을 텐데 하는 희망 사이에서 용기를 못 내고 수만 번을 망설였다.
결국 수술을 하기로 독하게 마음을 먹었는데, 첫 번째 수술은 가슴을 열었다 그냥 닫고 말았다. 도저히 손을 댈 수 없었다고 한다. 이제 끝인가? 신은 인간에게 견딜 수 있는 아픔까지만 주신다더니 다 거짓말이라고 나는 목 놓아 울었다.
그리고 1년 후 다시 폰탄 수술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수술을 하기까지 한 달 동안 남편과 나는 성아가 원하는 것은 다해 주었다. 좋아하는 라면도 마음껏 끓여 먹이고, 통닭이랑 피자도 시켜 주었다. 살이 찌면 안 되기 때문에 식사량도 정해져 있었고 식단도 엄격해 그동안 성아가 먹고 싶은 것들을 거의 먹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쩌면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2007년 9월 5일,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엄마 아빠를 향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한 번 씩 웃어 주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들어가 버린 성아. 엄마 아빠가 불렀는데 왜 돌아보지 않았냐고 나중에 물었더니 자기가 돌아보면 엄마 아빠가 더 가슴 아파 울까봐 못 돌아봤다고 말하는 마음 깊은 아들.
아침 8시 30분에 시작된 수술은 오후 5시 30분이 되어서야 끝났다. 중환자실로 가 ‘대기실에서 기다리십시오’라는 문자가 뜬 것을 보고서야 ‘살았구나’라는 생각에 기쁨의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러나 중환자실에서 성아를 보는 순간 너무나 참혹한 광경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가슴은 갈비뼈에 쇠고리가 걸린 상태로 양쪽으로 벌어져 있었고, 벌어진 가슴 위에는 특수 비닐이 덮여 있었다. 그리고 그  덮인 비닐 속으로 시뻘건 내 새끼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 이상 아프게 하지 말고 그냥 성아와 함께 편하게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보, 성아가 견디다 견디다 너무 힘들어 이 세상을 포기하면 우리도 같이 성아 따라 가는 거다? 힘들어 걷지도 못하는데 성아 혼자 보낼 수 없잖아. 그치? ”
남편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손을 잡으며 그동안 미안했다고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 삶에 기적은 분명히 있다
날짜가 지나면서 부기가 조금씩 빠지고, 성아 얼굴이 천천히 돌아왔다. 매달렸던 기계와 주사약도 많이 줄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가슴을 닫는 수술을 해야 하는데 부기가 덜 가라앉은 상태에서 닫는 수술이라 심장이 눌려 바로 멎을 수도 있다고 했다.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지만 의료진을 믿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12년 동안 심장을 몇 번씩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성아 살려 놓은 의사 선생님이 자신 없으시면 그런 결정을 하셨을 리 없어. 그래. 무조건 믿는 거야! ’
가슴을 닫았다. 무섭던 쇠고리도, 비닐도 다 떼어 냈다. 가슴에 길게 난 수술 자국이 마치 기찻길 같았다.
“나 너무 아파. 그냥 죽고 싶어. 엄마 나 좀 살려 줘.”
정신이 돌아온 성아가 너무나 고통스러워 애원하며 울었다. 그 모습이 아파서 진통제 좀 놓아 달라고 부탁하며 함께 울었다.
성아가 열 발짝쯤 걸음마를 할 때 우리는 퇴원했다. 성아를 안고 집으로 오던 날은 내 생애 최고로 행복한 날이었다. 그 후 재활치료를 열심히 받았다. 12년 동안 굳었던 근육을 되살리느라 눈물을 뚝뚝 흘렸지만 성아는 악착같이 치료를 받았고, 지금은 학교도 조금씩 걸어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거실에서 친구들과 컴퓨터 게임을 하며 깔깔거리는 성아의 웃음소리는 날 행복하게 한다.
평생 피를 굳지 않게 하는 약을 먹으며 조심스럽게 살아야 하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 우리 가족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행복하다. 휠체어를 타지 않고도 제법 잘 걷는 성아. 가끔 엄마 아빠에게 팔씨름을 하자며 도전도 해온다. 아빠가 엄살을 부리며 져 주면 우쭐해하며 기뻐하는 녀석. 빨리 커서 엄마 아빠 마음 아프게 하고 걱정 끼친 모든 것 ‘따따블’로 갚겠다는 우리 아들이 엄마 아빠는 너무 자랑스럽다.
고생하고 힘들었던 만큼 지금의 이 행복이 영원할 거라 믿는다. 이제 다시는 아프지 말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성아가 되길 마음속으로 빌어 본다.
그리고 나와 같은 상황의 엄마에게 말하고 싶다. 기적은 있다고. 아무리 어렵고 힘들고 죽고 싶어도 포기하지 말라고. 아울러 우리 아들을 살려준 서울아산병원 박인숙·서동만 교수님과 수많은 의료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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