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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과 친구하기 책으로 둘러싸인 ‘놀이터’ 박미경

시끄러워서 더 좋은 도서관
온갖 소리가 사이좋게 섞인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엄마가 아이에게 책 읽어주는 소리, 이웃과 이웃이 안부를 나누는 소리…. 그 어떤 소리도 다른 소리를 밀어내지 않는다. 밀어내지 않으니 자유롭고, 조용하지 않으니 편안하다.
‘시끄러워서 더 좋은’ 느티나무도서관은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사립 공공도서관이다. 시작은 사립문고였다. 동네 한복판에 느티나무를 닮은 도서관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온 박영숙(43) 관장이 2000년 2월 사재 2억 원을 털어 경기도 용인시 수지의 아파트 지하상가에 ‘덜컥’ 문을 열었다.
햇볕도 들지 않던 40평의 미니도서관이 지하 1층 지상 3층의 ‘번듯한’ 새집으로 이사한 것은 2007년 11월의 일. 사립도서관에 공공성을 담기 위해 2003년 10월 느티나무재단을 설립했고, 어린이 중심의 공간에서 어린이와 어른 모두를 위한 공간으로 거듭났다.
하드웨어는 달라졌지만, 소프트웨어는 달라지지 않았다. 느티나무도서관은 여전히 책으로 둘러싸인 ‘놀이터’이고, 아무도 가르치지 않는 ‘배움터’이며, 누구나 꿈꿀 권리를 누리는 ‘꿈터’이다.
“도서관은 공공성의 마지막 보루예요. 나이, 학력, 국적, 성별, 언어, 종교, 그 무엇으로도 차별받지 않고 누구나 누릴 수 있어야죠. 헌데 공공도서관이 반드시 공립일 필요는 없어요. 도서관은 수익을 내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공립도서관이 여러 모로 어울리지만, 공립으로 가다 보면 법적·행정적 틀에 갇히기 쉽죠. 틀에 갇히면 문턱도 높아질 수 있고요.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시끌벅적하고 사람냄새 나는 도서관이 되기는 힘들 거예요.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후원만으로 도서관을 꾸려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립도서관이 어떻게 공공성을 확보해 나가는지, 차별 없는 배움과 가슴 뛰는 만남을 어떻게 이끌어 가는지 보여주고 싶어요.”

차별과 통제, 가르침 없는 도서관
아무도 차별하지 않는 공간답게 느티나무도서관은 이용자를 위한 배려가 곳곳에 숨 쉰다. 어떤 공간에도 문턱이 없고, 문턱이 없는 대신 아기들이 기어 다닐 수 있는 온돌마루와 누구든, 장애인이나 노약자가 아니라도 타볼 수 있는 휠체어가 있다.
꼬마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 지하 입구의 미끄럼틀과 책꽂이 옆 그네의자다. 미끄럼틀과 그네가 좋아 이곳을 드나들던 꼬마들이 어느 순간 책을 장난감 삼아 놀기 시작하는 것이 이곳에선 아주 흔한 풍경이다.
바닥에 엎드려 만화를 볼 수 있는 다락방과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영화를 볼 수 있는 영화방은 초등학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공간. 제각기 편한 자세로 책을 보거나 친구와 어깨를 기댄 채 영화를 보면서, 아이들은 스스로 배운다. 독서확대기와 보이스아이 같은 보조장치가 있어 눈으로 책을 보기 힘든 사람도 책을 읽을 수 있고, 그림책 한 권 한 권에 점자가 입혀져 있어 시각장애를 가진 부모들이 아이를 안고 그림책을 읽어줄 수 있다.
‘차별’과 ‘통제’ 말고도 느티나무도서관에는 ‘없는 것’이 많다. 책을 읽으라는 ‘강요’나 어떤 책을 읽는 것이 좋다는 ‘권유’, 그리고 누군가를 가르치는 ‘강좌’가 그것이다. 그 대신, 책을 매개로 만나 가슴 뛰게 소통하는 ‘모임’들이 여럿 있다. 어른들을 위한 ‘느티나무독서회’, 유아들을 위한 ‘꼬마또래방’, 청소년을 위한 ‘랜덤클럽 & 비행클럽’ 등이 그것이다.

공동체 문화 살아나
도서관에서 개발한 프로그램도 일회적이지 않고 ‘일상적’이다. 매일 오후 3시면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참’에서 자원활동가들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수요일 오후 4시엔 지하 강당에서 역시 자원활동가들이 (그림책을 한 장 한 장 찍어 만든)‘빛그림’을 보여주며 책을 읽어준다.
만나고 싶은 작가를 초대해 책 이야기와 사는 이야기를 들어보는 ‘지은이 만남’도, 주말 오후 느긋하게 나들이 온 이웃들과 영화 한 편의 추억을 쌓는 ‘영화세상’도, 늦은 저녁 편안하게 슬리퍼를 신고 나온 이웃들과 영화도 보고 이야기 손님도 만나는 ‘마을사랑방’도, 주민들의 일상에 촉촉한 단비로 스미고 있다.
“1년에 두 번 마을잔치를 해요. 하나는 도서관 생일날 마을사람들과 떡을 나누는 생일잔치고, 또 하나는 어린이날 마을사람들과 함께 김밥을 만들어 먹는 김밥잔치예요. 김밥잔치의 경우 마을 분들이 속에 넣을 재료를 한 가지씩 마련해 와서 함께 김밥을 만드는데, 어떤 재료를 누가 얼마나 가져올지 미리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얼마나 맛있는 김밥이 만들어지는지 몰라요. 김밥을 만들어 먹은 뒤에는 줄넘기도 하고 줄다리기도 하면서 신나는 하루를 보내요. 마을마다 느티나무 같은 도서관이 하나씩 생긴다면, 잃었다고 생각했던 지역공동체문화는 저절로 살아날 겁니다.”
전미경 사서팀장의 얼굴에 ‘그 날의 기쁨’이 고스란하다.
느티나무도서관에는 100여 명의 자원활동가(도우미)가 있다. 찢기고 뜯긴 책을 감쪽같이 붙이고 꿰매주는 사람,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사람과 그림책을 사진으로 찍어 슬라이드 필름에 담는 사람, 새로 들어온 책을 하나하나 싸고 번호표를 붙이는 사람, 소식지를 봉투에 담고 주소를 붙이는 사람….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산더미 같은 일들을 신나게 해치우는 그들이 있어, 느티나무도서관의 바퀴는 녹슬지 않는다.
“느티나무를 알기 전에는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주변에 없었어요. 엄마들과 나누는 대화란 게 맨 사교육 얘기뿐이어서 답답했죠. 책과 삶, 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들이 생겨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세 딸과 자원활동을 함께 하는데 그것도 참 즐거워요. ‘작은 도우미’라고 느티나무에선 아이들도 고사리손을 보태거든요. 딸들이랑 번호표도 붙이고 책도 정리하면서, 함께 노동하는 기쁨을 누려요.”
도우미 회장을 맡고 있는 정성미 씨. 얼굴 표정이 그의 행복을 말해준다.   
이렇게, 잿빛 아파트 숲에 초록빛 나무가 자란다. 사람을 사랑하게 하고 좋은 세상을 꿈꾸게 하는, 한 그루 눈부신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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