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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그대가 되어 "어머니, 아버지와 사는 게 즐거워요" 이인영

“도라지 도라지 백도오라아지~~.” 치매 할머니 몇 분이 요양보호사와 함께 노래를 한다. 천혜경로원 3층 거실에 노랫소리, 웃음소리가 왁자지껄 섞였다. 몇몇 할머니들이 긴 젓가락으로 알록달록 색종이를 오려붙인 링(휴지 속으로 만든)을 전달하는 놀이를 하며 박수를 받고 있다. “노오들 강변 봄 바람에~~” 한 분은 표정도 없이 있다 분위기에 고조되었는지 노래에 합류한다. 바로 붙은 방,  문지방 뒤에서는 한 할머니가 소리를 냅다 지른다. “베개, 베개, 가져와! ”

함께 놀이를 하던 박영숙(62) 사무국장이 일어나더니 또 다른 방으로 들어간다. 침대가 다 비었는데 100세 박팔순 할머니 홀로 밖의 소란함에도 아랑곳 않고 주무신다.

“어머니, 어머니…”하고 부르는 박 국장 소리에 갑자기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는  할머니. 박 국장을 보자 손을 덥석 잡는다. “안 보면 눈에 삼삼혀. 쪼깨만 안 보면 보고 잡고.” 눈물을 다 글썽이는 할머니는 눈을 비비며, “사는 게 이뻐” 하신다. 정신이 맑으시다.

광주시 학동사거리 대로변에 위치한 천혜경로원. 박영숙 국장의 시아버지인 강순명 목사 가 1952년에 무의탁 노인들을 돌봐주기 위해 호남지역 최초로 설립한 사회복지법인으로 지금은 70명의 노인이 살고 있다. 박 국장은 강순명 목사의 차남 강은수(65) 원장에게 23세에 시집와 노인들과 한 가족으로 살아왔다. 강은수 원장 부부는 누가 더 노인들에게 잘해주나 마치 시합이나 하듯 모시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자원봉사자 최순백 씨가 ‘매화의 백탕’ 차를 권했다. 크고 작은 청매화가 입안에서 쌉싸름하고 달콤한 향을 톡 터뜨린다. 차향에 취해 있자니 박 국장이 “지난 주 눈이 내릴 때 녹차에 홍매화를 띄워 드렸어요. 치매가 있으셔도, 98세 노인도 그때만큼은 얼마나 얌전히 정중하게 드시는지 저도 놀랐어요” 말한다. 정중하게 대접하니 정중하게 차를 즐기셨나 보다. 그가 직접 염색한 다포를 깔고 개별로 아름답게 차를 드렸다. 차 대접에는 당신들이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대접받고 호강하고 있다고 느끼게 하고 싶은 그의 강한 염원이 깔려 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늘 성찬에 놀라곤 하는 건 같은 연유다. 노인들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다고 생각해 해드리고 싶은 걸 미루지 않는 부부는 음식에 가장 많은 신경을 쓴다. 음식담당이라는 강은수 원장은 그날도 분주하게 움직이며 고구마를 굽고, 흑돼지 바비큐를 구웠다.
그날 점심도 맛깔스러웠다. 돼지 바비큐에, 옥상에서 노인들과 함께 기른 무공해 상치, 깻잎, 직접 쑨 메주로 만든 된장 쌈장, 씀바귀, 시금치나물 등이 푸짐하게 차려진 깨끗한 식당에서 점심을 했다. “가정보다 더 좋아. 화내는 법이 없어.” 이곳에서 7년을 살았다는 이봉순(78) 할머니가 군고구마를 권하며 편하게 얘기한다.

언젠가 킹크랩을 먹을 기회가 있었던 강 원장 부부는 그 맛이 너무 좋아서 마음에 걸렸다. ‘우리 어른들이 이가 없어도 얼마나 맛있게 드실까’라는 생각에 머물자, 부부는 공판장으로 향했다. 한 번에 100만원이 들었지만 사서 정성껏 해드렸다. “어쩜 이렇게 맛있을까”하던 노인들을 위해 그 후에도 몇 번인가 킹크랩 찜 요리를 만들었다.

시아버지 강순명 목사는 해방 후 서울에서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도우시더니 전쟁 중인 1952년 광주시 사동에서 목회활동을 하셨다. 강 목사는 밖에 나갔다 하면 전쟁고아들과 몸이 불편한 노인들을 모시고 왔다. 가족들은 당장 먹고 살기 힘들어 심란했지만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1953년, 현재 자리인 학동으로 옮겨 교회를 운영하고 노인들을 돌보는 삶을 이어나갔다. 어느 날 강 목사는 그곳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두고 훌쩍 서울로 올라갔다. 토굴집을 마련하고 방황하는 청소년을 돌보며 기술도 가르쳤다. 강 목사는 나환자의 피고름까지 입으로 빨아낼 만큼 숭고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토굴이 눅눅해서 병을 얻었는지 박영숙 국장이 시집왔을 때는 시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시어머니 장신애 여사가 천혜경로원을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120여 명의 노인을 돌보느라 시어머니는 고생이 말도 못하게 심했다. 어머니를 따라 새벽에도 찾아드는 노숙자를 목욕시키고 새 옷을 갈아입히며 재우고 일하던 며느리. 젊은 새댁 시절부터 그는 리어카에 빨래감을 싣고 가 겨울철 언 개울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했으며, 어릴 적 틈틈이 배웠던 피아노 레슨을 해 부식비에 보탰다.

대를 이어가는 사랑
그는 그런 삶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친정아버지도 전쟁고아들을 돌보았다. 전북 순창애육원을 운영하셨기에 고아들과 똑같이 자랐다. 자식에게는 엄했던 아버지. 고아들에게는 바지 가랑이에 몇 명이 달라붙어도 “이놈들이” 하며 화 한 번 안 내셨다. 그 모습이 그렇게  좋아 보였고 자식들 삶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아버지, 아버지처럼 이런 일을 하는 걸 뭐라고 해요? ” 초등학교 때 장래 희망 난에 쓰기 위해 물었다. “사회사업이란다.” 그의 꿈은 사회사업이 되었고, 그 삶을 대를 이어 살고 있다. 사실 친정아버지는 결혼을 반대했다. 딸만큼은 그 지난한 삶을 살지 않고 평범한 여염집 여자로 살길 원했다. 그들은 양쪽 부모님을 존경했다.

“재밌고 즐거워요. 나에게 맡겨진 노인을 잘 보살펴드리는 게 제 의무예요.”  그의 보살핌은 임종 때까지 이어진다. “어머니, 좋은 세상에 먼저 가 계세요. 저도 뒤따라가겠습니다.” 작별인사를 하며 외롭지 않게 임종을 맞도록 지킨다. 돌아가시면 전 식구가 상복으로 갈아입고 장례를 지낸다. 새댁 시절에는 관이 나가는 모습만 봐도 무서워 울었던 그지만 곧바로 그 일을 맡아 할 수 있었다. 둘째아이 임신 중에도 염을 해드렸을 정도로 그는 자신의 일로 받아들였다. 그는 지금까지 160명의 입관을 했다.

“노래방에 있는 한복 입은 사진을 보면 애틋해지고 눈물이 납니다.” 남편인 강 원장이 말했다. 노래방 건물에는 어머니, 아버지와 그들 부부가 한복을 곱게 입고 찍은 사진이 걸려있다. 그 사진의 몇 분은 벌써 세상을 떠났다. 한 분씩 돌아가시는 것이 맘이 아프다. 그리고 자연스레 고생 많이 한 아내에게도 미안한 생각이 든다. 남편은 온유하며 아내는 활동적인 두 사람.  마음은 하나로 늘 같은 자리에 있었다. 둘은 영산강이 흐르는 천변을 손잡고 걸으며 서로 보완의 삶을 다져나갔다.

환경 개선에 주력하여 시설이 매우 안락하지만 일부 건물은 재건축을 해야 한다. 30년 전 아산재단의 1,000만원과 가족 후원금 800만원으로 건축한 2층짜리 아산관도 많이 낡았다. 오늘도 그는 또 새로운 건축의 꿈을 갖고, 노인들을 더 편히 모실 궁리를 한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이곳에서 일하는 둘째아들의 손길도 천혜경로원 곳곳에 스며 있다. 의자, 차탁, 황토방의 전등갓 등 수많은 작업을 맡아 하는 아들. 아버지 강 원장을 닮아 현장에서 화장실 청소며 온갖 허드렛일을 하고, 어머니를 닮아 손재주가 많은 강대민(35) 씨는 오늘도 존경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본받으며 묵묵히 살아간다. 두 분이 아름답기에 자식은 그 길을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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