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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산책 무용가 조흥동의 춤 세계 오윤현


 ‘춤 사전’. 인터넷으로 ‘태평무 남성 이수자 조흥동’이란 이름을 검색해 보니, 이런 별호가 눈에 띄었다. 우리는 한 분야에 도통하거나 능통한 사람에게 특별히 ‘사전’이란 단어를 갖다 붙인다. 이력을 살펴보니, 과연 특별했다. 뚜르르 꿰고 있는 춤만 태평무·한량무·소고무·장검무 등 10여 가지나 되었고,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등을 역임하며 직접 안무한 ‘대작’이 20편이 넘었다. 이쯤 되고 보니 자연스레 키 크고 늘씬한 춤꾼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그가 주로 머문다는 경기도문화의전당(수원시)에 도착해서도 그런 인상의 사람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현재 그의 직함은 경기도립무용단 예술감독. 11월말, 그는 경기도문화의전당 연습실에서 <태권무무(跆拳武舞) 달하>의 공연을 앞두고 맹연습 중이었다. 시연장에 들어서자 키 165cm 안팎의 자그마한 남성이 손을 내민다. 조흥동 (67)감독이였다. 진중한 표정과 짙은 눈썹 그리고 기품 있는 외모…. 인상이 강렬했다. 하지만 비교적 작은 키와 허름한 점퍼 탓에 내 환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실망했다는 말이 아니다. 그와 두 시간 남짓 마주앉아 보니, 이렇게 겸손하고 소박한 예술가가 어디 있을까 싶었다. 일단, 어떻게 춤 사전이 되었는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조흥동 감독의 춤 ‘입문’은 빨랐다. 1940년대 초, 경기도 이천의 쌀 부잣집에서 1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난 흥동은 부모의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특히 아버지는 뒤늦게 얻은 아들이어서인지 그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흥동은 엉뚱한 데 관심을 두었다. 예쁜 치마저고리와 춤에 특별한 호기심을 나타낸 것이다. 흥동이 판검사가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는 ‘저러다 말겠지’ 싶어서 그저 혀만 끌끌 차셨다.

 그러던 어느 날, 흥동의 춤사위를 귀엽게 봐주던 마을 어른들이 찾아온다. 농악 행사에 분위기를 띄울 ‘초립동이’로 흥동이를 지목한 것. 부모는 내키지 않았지만 마지못해 승낙한다. 그 일은 어린 소년의 가슴에 ‘춤 불’을 지핀다. “내 몸짓에 따라 웃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좋았다”라고 조감독은 돌이켰다. 이후 흥동은 자신의 춤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놀이패와 굿판을 가리지 않고 어디든 달려갔다.

 세월이 흘러 흥동이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부모는 ‘특단의 조처’를 내렸다. 그의 ‘끼’를 제어하려고 서울로 유학을 보낸 것이다. 그는 결혼한 둘째 누이 집에 머물며 학교를 다녔다.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중학생이었지만 남 몰래 고전무용연구소를 다니고 있었다. 남학생이 단 한 명뿐인 고전무용반. 늘 비웃음이 뒤섞인 타인의 시선을 느껴야 했다. 심지어 같이 무용을 배우는 여학생들조차 그의 춤사위를 보며 키득거렸다. 그때마다 몸짓이 흔들렸지만 그는 용케 참아냈다.

 한 해, 두 해가 흐르면서 그의 춤사위는 놀림의 대상이 아니라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만큼 집중하고, 그만큼 노력했다”라고 조흥동 감독은 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빼어나다’는 소리까지 듣는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부모는 그에게 공대 진학을 권유한다. 시험 결과는 낙방. 부모는 재수를 권유했고, 그는 요청을 받아들였지만 사실은 거짓 행위였다. 이미 서라벌예대(체육무용과)에 응시해 장학생으로 합격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소식을 부모에게 고하지 못했다. 그 탓에 ‘이중 생활’이 시작되었다. 학원에 가는 척하고 나와서 학교로 달려가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반년도 안 되어 들통이 난다. 여름방학 때 친구들이 불쑥 누님 집을 찾아와 산통을 깨트린 것. 부랴부랴 부모님이 올라오고, 누님들이 속속 모여든 가운데 가족회의가 열렸다. 모두 ‘지금이라도 그만두라’고 충고했다. 춤이 좋아 남 몰래 공부한 지 6년. 흥동은 물러설 수 없었다. 춤사위의 긴장감과 한 동작을 완성했을 때의 쾌감을 떨치기 어려웠다. 결국, 부모님이 먼저 ‘네 마음대로 하라’며 손을 들고 만다.

 이후 그는 발에 날개를 단 듯 유명 춤꾼들을 찾아다닌다. 대가들은 제 발로 찾아온 남성 춤꾼을 반겼다. 오고무와 승무의 이매방 선생, 태평무의 강선영 선생, 산조의 김진걸 선생, 승무와 살풀이의 한영숙 선생, 불교의식 무용의 임준동 선생 등이 그들이었다. 특히 태평무를 가르친 강선영 선생이 그를 아꼈다. 그가 남성 무용수로서는 처음으로 태평무를 이수한 것도 그 덕이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여고의 체육교사가 되어 춤을 가르쳤다. 첫 발표회를 연 것은 1968년. 그는 무용계로부터 ‘전통 무용계의 혜성’ 소리를 듣는다. 자신감이 충만하던 시절. 그런데 어느 날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한 달간의 해외 공연을 통해서 ‘세상은 넓고 한국 춤은 좁다’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교사 생활 6년째가 되던 해, 그는 조용히 학교를 떠났다. 조흥동이란 이름을 내걸고 무용연구소를 차리고 싶었다.

 한국 전통춤과 새로운 안무를 보급하는 일은 고되었다. 경제적 이득도 전혀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연구 발표한 전통춤들이 호평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한 가지 춤만으로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온몸으로 체득한 여러 춤을 섞어 또 다른 춤의 세계를 연출했다. 1979년, 그 같은 기량으로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에서 당당히 입상한다. 이후 다양한 춤 무대에 올랐고, 널리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명성을 얻었다고 배우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또 다른 대가들 옆에서 손을 맞잡거나 무릎을 맞댄 채 전통 춤을 습득했다. 김천홍 선생의 처용무와 춘앵전, 김백초 선생의 무용기법, 은방초 선생의 살풀이와 무당춤, 전사섭 선생의 설장고, 안사인 선생의 제주굿, 우옥주 선생의 황해도 만두대탯굿, 장홍삼 선생의 장검무, 김석출 선생의 동해오귀굿, 황재기 선생의 소고무 등을 그렇게 체득했다. 물론 배우는 데만 치중하지 않았다. 때때로 대학에 나가 자신처럼 춤에 몰입하려는 후학들을 가르쳤다. 그가 이제껏 강단에 섰던 대학은 10여 개. 지금은 경희대 겸임교수로 활동 중이다.

 그는 자신이 안무한 대작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맥> <무천의 아침> <강강술래>를 꼽았다. 11월 내내 연습한 <태권무무 달하>도 그의 역작 중 하나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달하>는 무용수 70여 명이 80분 동안 역동적이고 조화로운 동작으로 세상 만물의 사멸과 탄생을 보여주는 무용극. 태권도·태껸·선무도 같은 전통 무예가 등장한다.

 그는 무예의 강한 동작 탓에 <달하>의 안무가 무척 어려웠다고 고백한다. “무예는 멜로디를 타기 어렵다. 그래서 여러 차례 안무 요청을 거절했다.” 술(術)이 두드러져 예(藝)가 보이지 않거나, 예가 두드러져 술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여긴 것이다. 그의 안무 철학은 간단하다. ‘볼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연하는 사람만 재미있는 춤은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전통 무예를 춤으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그 점을 가장 중요시 여겼다. 그래서일까. 10분 동안의 무예 장면은 역동적이며 화려했고, 강고하면서 아름다웠다. 불의 신이 탄생하는 순간도 볼거리가 풍부했다. 무용수들이 붉은 천을 너울거리자 무대가 화산 불꽃처럼 벌겋게 활활 타올랐다. 동물들이 서로 먹고 먹히는 장면도 처절하면서 요염했다. 대사만 없었지, 마치 화려한 오페라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경기도립무용단 제자들에게 인자한 아버지 같은 그는 시연장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턱을 괴고 묵묵히 지켜보다가 조용히 다가가 자세를 바로잡아 줄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단원들은 연습인데도 온몸을 던져 하늘을 날거나 땅바닥을 뒹굴었다. 단원들에게 다가가는 그의 몸놀림은 유연하고 가뿐하다. 타고난 체형에다가 매일 아침마다 하는 연습 덕이었다. 그는 “지금 당장 무대에 오르더라도 공연이 가능하도록 매일매일 춤사위를 복습한다”라고 말했다. 그 같은 부단한 노력과 깊이를 알 수 없는 겸손함. 그것이 후학들의 존경심을 부추기고, 그를 최연소 예술원 회원으로 만든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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