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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자 인터뷰 효행가족상 박원복씨 고선희

 


 “아휴, 말이야 두 말할 것도 없지. 끝내주는 이장이지.”
  마을 사람들은 박원복 씨에 대해 하나같이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이장을 맡은 2003년 이래로 6년 동안 이 마을에는 1년에 한 건 이상은 ‘큰 공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울퉁불퉁 비포장 길이었던 마을 도로와 농로는 덩치 큰 농기계도 수월하게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널따랗게 정비되었으며, 비가 올 때마다 도로에 넘쳤던 물 또한 하수로 정비로 깔끔해졌다. 그 중에서도 그녀가 가장 보람 있게 생각하는 것은 마을 내에 버스 정류장을 두 개나 설치한 일이다.
  “어르신들이 시내를 나가시려면 저 멀리 마을 입구까지 걸으셔야 했거든요. 바로 군청에 달려가 한동안을 괴롭혔죠. 호호호. 정류장이 있으니 이제는 어르신들께서 안전하고 당당하게 버스를 세우고 타실 수 있게 되어서 제가 더 좋아요.”
  마을 주차장을 비롯한 각종 편의시설을 마련하는 등 그녀는 이 밖에도 마을을 위해 많은 힘을 쏟았다. 그 때문인지 그녀와 마을을 도는 중에 만난 어르신들은 멀리서도 그녀를 반기시며, 당신들의 자식자랑 하듯이 칭찬을 늘어놓는다.
  “암만! 똑소리 나제. 이렇게 이장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구 혀어~.”  그동안 시·군의 예산 문제 때문에 미뤄둘 수밖에 없었던 농로를 올해는 마저 다 포장할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하는 박원복 씨. 그녀를 보면서 마을에 대한 애정과 이장 일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다들 좋으신 분들이셨어요. 시어머니께는 엄하셨지만 저한테만은 따뜻하셨던 시할머니, 비오는 날이면 밖에서 돌아오는 저를 위해 항상 우산을 들고 버스 정류장으로 마중 나와 주셨던 시아버지, 그리고 어디 가면 모녀지간으로 보일만큼 다정했던 시어머니….”
결혼할 당시, 셋째 아들이었던 남편이 이미 시할머니와 시부모님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시어른들을 모시게 되었던 그녀. 종갓집이라 한 달에 한 번 꼴로 제사를 드려야 하는 점이 무척 낯설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시어른들이 많이 예뻐해 주셨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견뎌낼 수 있었다며 눈시울을 붉힌다.
“초상을 세 번 치르니 12년이 지났네요.”

1997년 시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고, 2003년 돌아가실 때까지 그녀는 시아버지의 대소변을 받으며 6년간 병수발을 하였다. 정신만은 맑으셨던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험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혼자 애를 쓸 때는, 자신이 시아버지께 그것밖에는 안 되는 존재였나 하는 생각에 정말 힘이 들었다고 한다. 1998년에 시할머니가 91세로 돌아가시고, 그런대로 건강을 유지하셨던 시어머니마저 2007년 초 심근경색으로 입원치료를 받다가 올 5월 하순에 돌아가시면서 집이 한없이 적막해졌다는 박원복 씨. 시어른들 생각이 많이 난다는 그녀는 오히려 아픈 시어른들을 좀 더 잘 모시지 못한 것을 가슴 아파했다.
“그래도 시어른들이 다 살아계셨던 그 때가 가장 행복했었던 것 같아요.”
낮에는 마을 일을 하고, 밤에도 근처의 닭 가공 공장에서 일을 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그녀. 이제 시어른들은 안계시지만, 마을 어르신들을 부모님처럼 모시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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