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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편지 엄동설한 후에는 봄이 온다 이훈구

기상대 예보는 올 겨울이 그다지 추울 것 같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기후는 따뜻할지 모르나 국민들의 올 겨울 살림은 그 어느 해보다 추운 엄동설한이 될 것 같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한파가 드디어 한국에도 상륙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유명 건설회사가 파산신청하고 자동차 공장이 휴업할 예정이다.

나는 문득 10년 전 한국에 불어닥친 외환위기가 회상되었다. 당시 외환위기로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였고 이에 따라 수십만 명의 근로자가 길거리로 내몰렸다. 낮에는 공원에 노숙자가 진을 쳤고 밤에는 지하철역이 이들로 점거되었다.

노숙자를 구원하기 위해 정부는 쉼터를 마련하고, 여러 사회단체는 밥집을 운영했다. 당시 나는 명동성당이 운영하는 밥집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식사도우미를 하는 한편 이들에게 심리 상담을 해주었다. 그때 한 아버지가 저학년 초등학생을 대동하고 점심식사를 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가장(家長)이 실직하면 대부분의 가정이 파괴된다. 그러나 어떤 가정은 비가 온 후 땅이 더 굳어지듯이 탄탄해진다. 그럼 어떤 가정이 파괴되고 어떤 가정이 더 굳어지는가? 평소 부부간의 금실이 이를 결정한다. 부부 사이가 좋은 경우, 경제위기와 가장의 실직은 오히려 가족 구성원을 튼튼하게 결집시킨다. 그래서 이런 가정은 무난히 경제공황을 넘긴다. 반면 평소 남편이 부인을 구박했던 경우, 남편이 실직하면 부인은 가출한다. 그동안 참고 참았던 분노를 가출로 앙갚음하는 것이다. 그러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남편은 노숙자 신세가 된다.

노숙자가 일주일간 노숙하면 정신적 황폐가 시작된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또 식사도 불충분해 몸이 쇠약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희망을 잃고 하루하루 술로 날을 지새운다. 그래서 쉼터에서는 노숙자들이 술 마시는 것을 엄격히 금한다.

그러나 쉼터에서 재활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도 많았다. 공공근로사업에 매일 나가 일당을 벌어 꼬박꼬박 저축하는 쉼터 재소자를 본 적이 있다. 이들이 희망을 잃지 않은 것은 비록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어도 가족과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리상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가족을 찾아주는 일이었다.

며칠 전 을지로입구 지하철역에 내려가 보니 몇 사람의 노숙자가 기거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들이 최근 우리의 경제 불황으로 생긴 노숙자는 아닌 것 같다. 왜 그러면 노숙자가 아직 남아 있는가? 노숙자들이 1개월 이상 노숙생활을 지속하면 이로부터 벗어나기가 아주 힘들다. 노숙생활이 일반인에게는 비참해 보이지만 노숙생활에 길들여진 사람에게는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아무 걱정할 일도 없고 구걸로 먹는 것을 해결할 수 있으니 뱃속이 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숙자가 이 생활에 맛들이기 전에 그들을 구조해내야 한다. 노숙자들을 보니 10년 전의 악몽이 되살아난다.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정부가 미리 미리 대책을 마련해야한다.

불황과 경제위기는 국가나 국민에게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미국 발 경제공황에 다른 나라보다 충격을 덜 받고 있는데, 그 원인은 우리가 10년 전 국제 통화기금관리체제 때 기업의 재무구조를 크게 개선했기 때문이다. 또 직장을 구하지 못한 사람이나 실직한 사람이 이때를 자기 개발하는 기회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1964년도 지금처럼 취업이 하늘에서 별 따기였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취업의 꿈을 접어두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2년을 기다리며 공부해 석사학위를 취득하니 바로 직장이 나타났다. 나는 당시 내가 취업할 수 없었던 것이 오히려 나에게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판단한다. 취업이 되지 않아 대학원에 갔고 그래서 심리학자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추운 겨울은 우리가 생각하기 나름이다. 겨울은 길어보았자 2~3개월에 불과하다. 곧 봄이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 둔다면 우리의 추운 겨울은 그런대로 견딜 만하다. 그러나 봄이 온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엄동설한을 이겨낼 수 없다. 엄동설한은 우리를 강인하게 만드는 하늘의 시련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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