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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산책 고난 속에 핀 오색영롱한 꽃 오윤현

외갓집은 청간정(관동 8경 중 하나)이 멀지 않은 바닷가에 있었다. 그 덕에 흰 말의 갈기처럼 넘실대는 파도를 보며 자주 해안을 걸었다. 그때마다 발아래서 보석처럼 반짝이는 것들이 있었다. 비단고둥과 가리비, 전복 껍질이었다. 조각난 조개껍질들은 무지개나 보석이 스민 듯 눈부셨다. 그것들을 소중히 주워와 머리맡에 두면 비릿한 바다 향이 났고, 자장가 같은 파도 소리가 어슴푸레 들렸다.

그뿐이었다. 그것을 연마하거나 갈아서 무엇을 만들 생각은 전혀 못했다. 그러나 나전(螺鈿:조개껍질을 상감하여 장식하는 공예 미술)을 처음 창조한 ‘예술가’들은 달랐다. 그들은 그것을 주워 와서 숫돌 등을 이용해 낙엽처럼 얇게 간 뒤, 소반이나 칼 손잡이에 붙여 보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아름답다’ ‘멋지다’라고 상찬하자, 더 우아하고 아름답게 조개껍질을 세공해서 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먼 훗날 나전이 옻칠과 결합해서 더 은은하고 아름다운 멋을 풍기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이처럼 나전칠기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영장류가 사람이 되듯이, 단순한 조개껍질에서 아름다운 전통문화로 ‘진화’해 왔다. 명장 배금용(65) 씨는 지난 55년 동안 그 진화를 거들었다. 그러나 그 일은 나전처럼 빛나거나 찬란하지 않았다. 오히려 칙칙하고 갑갑한 날이 더 많았다.

그가 나전을 처음 만난 것은 열 살 때였다. 아버지가 갑작스레 세상을 뜬 이후 고아원에 맡겨졌던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그곳에서 탈출했다. 이유는 하나, 배가 고파서였다. 고아원을 나온 그는 깡통을 들고 다니며 구걸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터미널에서 운명처럼 외삼촌을 만났다. 외삼촌은 무작정 그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고,  그는 그때부터 이웃해 있던 나전공방을 드나들었다. 1953년 10월경 일이었다.

더 다행스러운 점은 그 공방이 나전칠기 2대 장인으로 꼽히는 최준식 선생의 작업실이었다는 사실이다. 나전칠기 계보는 조선 후반기 김봉룡 선생부터 전성규-최준식-민종태로 이어져 왔는데, 운 좋게 명망 있는 장인을 만난 것이다. 그러나 처음 그가 그곳에서 배운 것은 나전칠기가 아니었다. 물지게를 지는 일뿐이었다. 일꾼들이 먹고 쓰는 물을 3년간 지고 다녀야 했다. 그 사이 일꾼들이 하나둘 조개껍질을 팽개치고 떠났다. 산업화로 여기저기에 일자리가 생기자 더 편한 곳으로 일자리를 옮긴 것이다.

3년 뒤, 최준식 장인의 곁에는 단 한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열세 살 배금용 어린이였다. 최선생은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나전 기술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고아원 탈출 이후 포기한 구구단과 곱셈도 함께 가르쳤다. 배씨는 거듭났다. 매일매일 귀얄로 옻칠을 하고 새김칼로 자개에 문양을 그려넣어야 했지만, 새로운 발견에 힘든 줄 몰랐다. “어린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 많은 나전칠기 인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라고 배씨는 돌이켰다.

배씨가 명장 소리까지 듣게 만든 나전칠기 인생을 ‘한 많은’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일이 여간 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난도 뒤따랐다. 명성이 자자한 장인들도 생활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최선생을 통해서 알게 된 심부길 선생(훗날 중요무형문화재 10호), 홍순태 선생(훗날 무형문화재 칠장) 등도 사양길에 들어선 나전칠기를 부흥시키지는 못했다. 그 와중에 배씨는 나전칠기로 만든 화병·쟁반·담배함·소반 등을 백화점에 납품해 쏠쏠하게 재미를 보지만, 어디까지나 반짝 경기에 지나지 않았다.

1960년대 말 들어 수공 나전칠기는 더 가파른 내리막길에 들어선다. 포마이카(formica)상 등이 대량 생산되면서 장인들이 설자리를 잃은 것이다. “당시에는 나전으로 만든 상과 장롱이 없는 집이 없었다. 문제는 그 상과 장롱 등이 날림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그 결과 나전칠기 공예는 더욱 더 홀대받고 결국 사양길에  들어서게 된다”라고 배씨는 회고했다.

세월이 흐르며 400~500여 개나 되던 공방은 40~50개로 감소했다. 그는 그 고난에서 벗어나려 스스로 공방을 차렸다. 그렇지만 시대의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생활고가 꼬리를 물었다. 그는 공방을 작파하고 다시 친구와 스승의 공방을 드나들며 모세처럼 방황했다. “왜 하는 일마다 안 되는지, 그 탓에 술만 잔뜩 마셨다. 하루하루 힘들지 않은 날이 없었다”라고 배씨는 말했다.

고진감래, 그의 기술이 꽃피기 시작한 것은 1988년이었다. 어두운 공방에서 한숨을 내쉬며 옷칠을 하던 그에게 누군가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공예대전)에 ‘출품해 보라’고 권했다. ‘초등학교 3학년 중퇴’의 그는 망설였다. 자신의 깜냥으로 내로라하는 경쟁자들을 이길까 싶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그의 이름이 입선자로 신문에 게재된 것이다. 어찌나 기쁜지 며칠을 웃다가 울다가 했다. 그것이 마중물이 된 것일까. 이후 그는 ‘상에 올라탄 사나이’가 된다.

1988년 이후 공예대전에 다섯 번이나 입선·특별상을 차지하고, 동아공예대전에도 다섯 차례나 입선·특선한다. 경기도공예품경진대회에서는 더욱 실력 발휘를 해서 내리 6년 동안 입선·특선을 차지하고, 장려상과 동상까지 받는다. 그야말로 거침없는 손기술이었다. 1994년에는 마침내 제8회 대한민국 국제미술대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국가 공인 칠기능사 자격증도 따내고, 문화재 수리 기능 보유자까지 된다. 1998년에는 더 나아가 공예인의 꽃으로 불리는 경기도 무형문화제 24호 나전칠기장이 된다. 대한민국 명장이 된 것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01년 7월의 일이다.

     

명성을 얻기까지 그는 거의 매일 자개를 오리고, 조각하고, 할패하고, 옻칠을 했다. 그를 도운 것은 이름도 생소한 도구들이었다. 그가 가장 자주 손에 잡은 도구는 옷칠하는 데 쓰는 ‘귀얄’이었다. 사람의 머리털로 만드는데, 이 붓만큼 옻을 잘 먹이는 붓은 없다. 연필심처럼 가는 ‘실톱대’로 자개를 정교하게 오리기도 했다. 한쪽 각이 뾰족한 직삼각형 주걱은 칠을 배합하고 떠내거나 황토와 칠을 섞는 데 활용했다. 칠면(漆面)에 아교를 칠하고 자개를 붙인 뒤, 그 자개가 더 찰싹 달라붙게 만드는 인두도 주요 도구였다. 돌을 절단해서 만든 갈돌은 모서리 등을 연마할 때 요긴하게 활용했다. 그 외 자개와 생옻칠 그리고 흑칠(黑漆)·주칠(朱漆)·토분(土粉)은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었다.

나전칠기 공예품은 짧게는 한두 달 길게는 2년이 걸려야 완성된다. 가장 중요한 작업은 역시 자개 도안과 붙이기 그리고 옻칠이다. 옻은 보통 옻나무에서 추출한 생옻을 쓰는데 파라핀과 혼합해 쓴다. 배씨는 “10여 차례 옻칠을 한다고 설명했지만, 사실 마음에 들 때까지 하다보면 수백 번 넘게 칠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 횟수를 오로지 자신의 머릿속에 기록된 ‘과학적인 감’으로 정한다고 덧붙였다. 옻칠을 반복하는 것은 옻이 습기·온도 변화나 벌레의 침입 등을 막아 공예품의 내구성을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는 통일신라시대 나전칠기 작품 금은평탈보상화문경 등을 예로 들면서, 자신의 작품이 수백 년은 갈 거라고 장담했다. “물에 빠져도 물이 새지 않고, 썩지 않는 장롱도 만들 수 있다.”

그의 작업실은 남한산성 입구 성남시 민속공예전시관에 있었다. 성남시에서 명장을 예우해 그에게 너른 공간을 내준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요즘도 공들여 자신의 작품을 만들고, 문하생들에게 나전칠기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그가 재현한 고려시대 보물 나전국당초문경함은 수백 개의 보석이 박힌 듯 눈부셨다.

그는 최근 가업을 계승한 둘째 아들 광우의 도움으로 “새로운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바로 나전칠기를 현대화하는 작업이다. 과거의 나전칠기가 오색영롱한 조개껍질로 단순히 십장생이나 연꽃무늬를 재현했다면, 현대의 나전은 문양과 색깔이 다채롭고 쓰임새도 폭이 넓다. 심지어 나전 명함첩과 주걱과 필통까지 있다. 머리카락 굵기의 구리선을 상감해서 구름이나 꽃대궁 등을 더 정교하게 표현하는 기법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옻칠을 하는 그의 손놀림은 유연했지만 손은 거칠었다. 그 손으로 그는 용맹스러운 용무늬가 돋보이는 나전용문함과 우아한 두 마리의 봉황이 마주한 나전쌍봉문함을 만들었다. 그가 수백수천 번의 손길로 만든 작품들은 현재 국립민속박물관과 인천공항 등에 소장되어 있다.

헤어지면서 작고 주름진 명장의 손을 잡아보았다. 보기보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손끝에는 옻이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올해 초 펴낸 <나전칠기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1년 365일 동안 단 하루도, 아니 단 1초도 손이 깨끗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떳떳하게 손을 내민다. 이것이 나의 인생이니까….’ 한없이 겸손하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배용금 씨, 그는 영락없는 나전칠기장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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