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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과 친구하기 많은 이야기가 있는 곳 박미경

가난의 그림자가 우리들 모두의 등 위를 서성이던 60~70년대. 칠암도서관에 가면, 그 무렵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의 ‘로망’을 현실로 만날 수 있다. 한 방을 쓰던 형제들을 피해 혼자만의 상상에 잠기고 싶거나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좋아하는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싶을 때, 그럴 때 있었으면 했던 나만의 공간. 어린이실에 있는 ‘미로형 열람실’은 여러 식구들과 한 방을 쓰던 그 시절, 우리가 간절히 갖고 싶어 한 ‘나만의 방’을 연상시킨다. 길은 한 길이되 엉켜있고, 그 길 양쪽으로 개별 조명을 갖춘 독립공간들이 이어져 있어, 혼자서 책을 보거나 숨어서 사색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디지털자료실도 그런 공간의 하나다. 높은 칸막이가 벽을 만들어줘 마치 별실처럼 느껴지는 ‘IPTV코너’는 원하는 방송을 원하는 시간에 볼 수 있는 ‘나만의 휴게실’이다. 칸막이는 높지 않지만 공간의 독립성은 확실히 보장되는 ‘DVD/VTR코너’는 보고팠던 영화를 원 없이 볼 수 있는 ‘나만의 극장’이다. 한 대의 흑백TV가 온 가족의 저녁 휴식을 책임지던 시절, 어린 우리들에게 채널선택권이란 말은 언감생심의 단어였는데. 선택의 자유는 물론 독립의 자유까지 보장해주는 이곳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노라면, 어린 날 우리가 쏜 ‘꿈의 로켓’이 지금 여기에 착륙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절로 고개를 든다.

주민 참여의 열기 뜨거워
칠암도서관은 김해가 고향인 향토기업가 고 박순규 씨가 김해시에 재산을 환원하면서 세워진 ‘착한 도서관’이다. 칠암은 그의 호. ‘기업이윤을 사회에 환원해 후학을 양성한다’는 그의 유지가 지역주민을 위한 도서관 건립으로 꽃을 피우면서, 김해시민들은 평생의 배움터이자 쉼터인 소중한 공간 하나를 갖게 됐다.

도서관 옆에는 공연장이 형제처럼 서있다. 일주일에 한 번 지역주민들을 위한 ‘수요명화’가 상영되고, 일 년에 수십 차례 지역주민들이 선보이는 공연들이 이곳에서 펼쳐진다. 꼬마들의 재롱잔치부터 음악동아리의 연주회, 청소년들의 댄스발표회까지 무대에 서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곳 공연장에서 자신만의 끼와 재능을 선보일 수 있다. 철저히 주민들에 의한, 주민들을 위한 공간인 셈이다.  공연장이 젊은이들이 주로 꾸려가는 공간이라면, 전시실은 어르신들의 참여가 많은 공간이다. 서예로, 한국화로, 사진으로, 자신의 숨겨둔 재능을 전시를 통해 뽐내면서 노년의 향기를 더해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간다.

주민들에게 재능을 뽐낼 기회만 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칠암도서관은 다양한 문화강좌를 통해 주민들이 숨어있던 재능을 발견하거나, 알고 있던 재능을 더욱 빛나게 할 기회도 함께 주고 있다. 동화구연, 종이접기, 생활과학교실 같은 어린이강좌와 한국화, 한지공예, 주부노래교실, 북아트 같은 성인강좌가 요일별로 다양하게 마련돼 있다.

작년 10월에 첫 테이프를 끊은 ‘북스타트’는 칠암도서관 최고의 프로그램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다. 아기와 부모가 그림책을 보며 함께 춤추고 함께 노래하며 교감하는 이 프로그램은 ‘책과 함께 인생을 시작하자’는 취지로 북스타트한국위원회와 지자체가 함께 펼치는 지역사회문화운동프로그램. ‘북스타트’를 도입하면서 가뜩이나 뜨거운 칠암도서관의 주민참여는 하루하루 그 열기를 더해간다.

“일요일엔 ‘아빠와 함께하는 북스타트’가 열려요. 주로 엄마랑 아기가 참여해온 프로그램에 아빠의 자리를 만든 거죠. 처음엔 아기와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걸 쑥스러워하던 아빠들이 갈수록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요.” 사서 김정순 씨의 말이다.

오며가며 아무 때나 응모할 수 있는 주민참여코너도 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독서퀴즈와 어른을 대상으로 한 ‘한줄 감상평’이 그것. 사서들이 어린이용과 어른용 ‘그 달의 책’을 각각 선정, 주민들이 그 책을 읽고 난 뒤에 참여하는 프로그램들이다. 퀴즈문제를 모두 맞춘 어린이와 감상평을 멋지게 쓴 어른에게 소정의 상품이 지급되지만, 좋은 책을 읽고 정서를 함양했으니 응모 과정 자체가 이미 선물인 셈이다.

독서퀴즈와 한줄 감상평이 ‘사소하지만 알찬’ 프로그램이라면, 북카페는 ‘작지만 빛나는’ 공간이다. 2층 인문학자료실과 연결돼 있는 이 공간은 예쁜 조명 아래서 잡지를 읽거나, 차 한 잔을 마시며 생각에 잠기기에 좋은 곳이다. 북카페 벽에는 지역 내 명사들이 쓴 ‘내 인생의 책 한 권’이란 글이 커다란 패널로 전시돼 있다. ‘갈매기의 꿈’, ‘내 생의 아이들’, ‘백범일지’…. 차 한 잔을 마시며 누군가의 인생에 한 줌 빛이 돼준 책들을 엿보노라면, 내 인생 최고의 책은 무엇이었는지 문득 돌아보게 된다.

잊었던 것들을 다시 시작하는 곳
집처럼 편안하기 때문일까. 자료실 곳곳에 마련된 소파에는 ‘집에서처럼’ 책을 보는 사람들이 유독 많다. 슬리퍼를 벗고 양반다리를 한 채 책을 보는 사람도 있고, 읽던 책을 잠시 놓고 낮잠을 즐기는 사람도 있다. 가장 좋은 도서관은 가장 좋은 쉼터이기도 하다는 걸 칠암도서관은 아주 쉽게 증명해 보인다.

“집이 코앞이라서 자주 와요. 99년 개관할 때부터 아이 셋을 데리고 꾸준히 드나들었죠. 책도 책이지만 공연을 볼 수 있다는 게 참 좋아요. 결혼 전에는 영화나 연극을 꽤 자주 보러 다니는 편이었는데, 아이를 낳고 난 뒤론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거든요. 저녁을 먹고 아이들과 산책삼아 도서관엘 와서 재미난 영화나 공연이 있으면 꼭 보고 갑니다. 영영 못할 줄 알았던 문화생활을 다시 하고 있다는 게 문득 문득 참 행복해요.” 조삼녀(43) 씨의 얼굴이 되찾은 행복으로 환하다.

“집은 부산이지만 일터는 이 근처예요. 퇴직 후 집에만 있기가 답답해서 지인의 학원을 관리해주는 일을 시작했는데, 그 학원이 바로 요 앞이죠. 수업이 시작되면 40분의 짬이 생깁니다. 일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차가 올 때까지 또 그만큼의 자투리시간이 생기고요. 그 때마다 여기로 옵니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 퇴직 전에는 책 볼 짬이 거의 없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책을 잡으니 참 좋네요.” 올해 꼭 예순이 된 심상목 씨. ‘인생은 육십부터’란 말을 굳이 빌지 않더라도, 도서관을 통해 바야흐로 그는 새 인생을 시작한 듯싶다.

끊겼던 문화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하고, 잊고 살았던 책을 다시 읽게 만드는 곳. 칠암도서관에 가면, 잃어버린 무언가를 우리도 다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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