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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하루 그대가 되어 한평생을 장애인과 함께 이인영

5월 7일 꽃향기가 역삼동 충현복지관 직업훈련 프로그램실에 가득하다. 어버이날, 30여 명의 지적장애인과 자폐아는 정신을 집중해 만든 이 아름다운 꽃바구니를 부모님께 드릴 것이다. 그들은 꽃을 꽂으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최고로 성실하게 대답한다.

“선생님이 안 봐주셔서요, 혼자 꽂아요. 너무 재밌어요. 엄마가 아팠어요. 아빠도 고맙고. 저는 엄마 많이 닮았어요.” 너무 길게 꽃을 꽂아 웃음의 도가니를 만든 민주 씨가 말한다.

“낳아주셔서 고마워요. 길러주셔서 고마워요. 모르겠어요.”  “어버이날 제일 고마워요. 집에 향기 나면 좋아요.” “인생이 고마워요.” 이어지는 말들. 지은(29) 씨는 자신을 좋아한다고 밝힌 5살 연하 남자친구에 대한 속마음을 즉석에서 말해준다. “쟤는 이 여자 저 여자 다 좋아해요. 그래서 난 싫어요.”

두 번, 세 번 생각한 후 대답하는 세계에 익숙한 이가 오히려 머쓱해지는 세상이 이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게 좋아 평생 그림자처럼 곁을 지켜온 충현복지관 이정자(50) 사무국장이 곁에서 “순수하지요. 이 친구들이 보고 싶어 매일 일찍 출근한다니까요.” 하고 거든다.

이 사무국장은 지난 25년간 현장을 지키며 장애인들과 동고동락했다.
초등학교 시절, 영하라는 친구는 칠판을 볼 때 마다 미간을 찡그렸다. ‘왜 저러지?’ 했던 그에게 “원장 어머니가 안경 안 사줘…”라는, 전혀 상상치 못했던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충격을 받았다. 그때 그의 꿈은 정해졌다. ‘좋은 고아원 원장이 되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 후 운명처럼 늘 고아문제만 생각하던 그는 충남대 사회학과, 한림대 대학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1983년 한국장애인재활협회 대전지부 취업알선 담당으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 그는 장애인에 대한 사회인식 개선과 취업 알선에 최선을 다했다.

“못 들어간다니까!” 제일 통과하기 힘든 첫 관문인 기업체 경비실. 경비들은 그를 동냥을 얻으러 온 사람이나 잡상인 취급을 했다.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게 비나 눈 오는 날을 택해 가도 그들의 냉대는 몹시도 심했다. 대화공단을 걸어서 몇 번씩이나 돌고, 어떤 날은 장애인 한 명을 대동하고 다니기도 했다. 그런 끝에 한 곳이 뚫리면 옆 회사에 도미노 현상이 일어났다. 한 곳, 한 사람이 제일 중요했다. 한 장애인이 성실히 잘해주면 소문이 났다. “그런 장애인 있습니까?”하고 문의가 왔다. ‘열심히 일하고 직장 잘 안 옮기는 사람들’이란 소문이 돌면 여러 명이 혜택을 받았다.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일한 끝에 1년에 100명 정도 취업을 알선했다. 그러자 길을 걸어도 장애인만 보이고 대전 시내 장애인을 다 아는 게 목표가 될 만큼 빠져들었다. 밤에는 꿈을 꿨다. ‘왜 나만 취업 안 시키냐?’며 목발로 치는 장애인들 꿈까지 꾸다보면 ‘아, 이게 천직이구나.’ 생각이 들곤 했다.

제주도 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8년 근무할 땐 ‘취미생활하면서 월급을 받는구나.’하고 생각할 정도로 좋았다. 한라산으로 인한 왕래의 어려움을 간파하고 순회재활서비스를 하던 시절이다. 바닷가도 바닷가지만 산속 장애인 집 앞의 계곡 물이 찰랑거리면 몹시 아름다웠다. 그곳에서 봉사하러 다니던 남편도 만났고 의료, 교육, 재활 등에 헌신하며 신설 복지관의 사업기반을 닦아놓았다.

“귀가 뻥 뚫리는 것 같아요”
1997년부터는 한국농아인협회 사무국장을 맡아 청각 및 언어장애인들의 처우개선과 인권을 위해 뛰었다. ‘수화통역사 자격시험제도’를 정부에 건의하고 무료 수화통역센터를 장애인복지법에 의한 시설로 공적시스템화해 전국 40여 개소에 설치하게 하는 등 수화의 언어성 회복을 위해 애썼다.

“귀가 뻥 뚫리는 것 같아요.” 한글 자막이 있는 쉬리 영화를 보며 농아인이 말했다. 어렵게 구민회관에서 영화를 관람한 700여 명의 농아인을 보니 눈물이 다 핑 돌았다. 영화 ‘쉬리’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던 98년. “왜 우린 쉬리를 못 보냐?”며 농아인들은 속상해했다. “의식주도 해결 안 됐는데 문화지원을 하냐?”며 난색을 표했던 당시 우리 토양 속에서 김철환 기획팀장과 함께 공동모금회 지원을 받아 연간 20여 편의 한국영화자막 비디오를 제작해 전국에 보급할 수 있었다. 또한 TV방송국에 ‘TV 장례식 하겠다.’며 자막방송을 할 것을 요구했고, 2000년 방송법이 개정됐다.

“영화의 저런 농축된 언어, 축약된 언어가 너무 좋다.”며 반응이 뜨거웠다. 그가 집행위원장을 맡은 ‘제1회 장애인 영화제’에서 5일 동안 3천명의 장애인들이 영화를 관람했다. 그렇게 좋아들 할 줄은 몰랐다. 농아인 뿐 아니라 휠체어를 타는 지체장애인, 산만하다고 영화 관람은 꿈도 못 꾼 자폐아 등 많은 장애인들이 영화를 속 시원히, 마음 편히 보고 종합예술의 여운을 만끽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위해서도 세상에 인식전환을 요구했고 인권을 요구했다. ‘인권이란 기회를 똑같이 주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한 예로 장애인의 성적 욕구에 대해서 우리 사회는 기회조차 박탈한다는 것이다. 부모조차도 “어떻게 아이를 키우느냐?”며 결혼은 아예 안 해야 되는 것으로 여긴다. 심의기구를 만들고, 불임에 대해 부모선택권 혹은 자기결정권 등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혼은 해야 되는 걸로 생각을 바꾸고 지적장애인들에게 결혼지원금을 주면 좋겠습니다.”

그의 장애인 사랑은 식을 줄을 모른다. 매년 그는 장애인기능대회와 체육대회에 참여할 선수 발굴과 양성에도 힘쓰며 세계 진출을 도왔다. ‘2005 멜버른 농아인올림픽’에서 한국은 ‘1997 코펜하겐 농아인올림픽’ 성적인 37위를 껑충 뛰어 넘어 7위를 차지했다. ‘농아인 감독에게 훈련을 맡겨야 한다.’는 농아인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농아 여부를 떠나 뛰어난 체육 감독에게 맡기자고 한 그의 역할이 컸음은 물론이다.

단순조립작업 등을 착실히 배우고 있는 충현복지관의 정신지체인과 발달장애인들. 그곳엔 유아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200여 명의 장애인과 60여 명의 직원이 있다. 장애인 일부는 플러그를 생산하기 위해 단자조립, 사출품 조립, 박스 접기, 운반 등을 배운다. 그들은 익숙해지면 성실히 자기 몫을 한다. 세차를 하거나 주유, 공예, 외식업체 일 등도 할 수 있다. 자신의 노동으로 돈을 벌도록 직업재활사 선생님들은 열심이다. 이정자 사무국장은 복지관들이 좀 더 안정된 특화사업을 할 수 있게 지원하는 일을 하고 싶고, 재교육 연수 기회가 적은 소외 장애인에게 꿈을 담은 ‘평생교육’도 하고 싶다.

“민주야 꽃을 뽑아오면 안 돼!” 화분의 노란 꽃을 뽑아 꽃바구니를 장식하려는 아이에게 타이른다. 그가 이용인들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며 다정한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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