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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과 친구하기 부산 명장도서관 박미경

위치로 보면 시골의 마을회관을 닮았다. 큰 길가에 있는 대신 동네 한가운데 포옥 안겨 있어, 주민들의 ‘마실’을 수시로 부추긴다. 역할로 보면 도시의 문화센터를 닮았다.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영화를 보거나 문화강좌를 들으며 그 날이 그 날 같은 일상에 밑줄을 긋는다. 나무로 치면 정자나무에 가깝고, 방으로 치면 사랑방에 가깝다. 문턱 없이 드나들며, 몸을 쉬이거나 마음을 채우는 곳. 명색이 도서관이면서 자꾸만 다른 공간을 닮아가려 하는, 그래서 더 호감이 가는 이곳.

도서관에서 누리는 문화의 모든 것
벚꽃이며 복사꽃이 환한 새봄이면, 명장도서관(부산광역시 동래구 명장1동)엔 문화의 꽃이 함께 핀다. 넉 달 간의 겨울 쉼을 끝내고, 각종 문화교양강좌가 시작되는 4월. 봄 햇살을 머리에 이고 무언가를 배우러 이곳에 오는 주민들에게, 4월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달이다. 어디 4월뿐이랴. 옥상 위의 등나무가 보랏빛 꽃을 일제히 피워 올리는 5월은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달이다. 등나무 아래 나무평상에 앉아, 책장 위로 점점이 흩날리는 꽃잎이나 가슴 안으로 숨 막히게 밀려오는 꽃향기에 눈과 코를 내맡기는 시간. 김밥이나 삶은 계란 따위를 굳이 싸오지 않아도, 마음은 이미 소풍 온 사람의 그것이다.

무료로 운영되는 명장도서관의 문화교양강좌는 동양화, 서예, 앤틱 한지공예, 자녀 독서지도, 어린이 종이접기 등 모두 10여 개에 이른다. 그동안 이곳을 거쳐 간 수강생들은 무려 5,500여 명.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도 몰랐던 재능을 강좌를 통해 발견했고, 숱한 주민들이 자신이 손수 만든 작품으로 스스로의 집을 장식했다. 어떤 이는 아예 전문가가 됐다. 자녀의 독서지도를 위해 강좌를 듣기 시작한 뒤 실제 독서지도사가 되어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것. 작은 도서관 하나가 주민들을 더 넓은 세상으로 안내하고 있는 셈이다.

흔히 ‘놀토’라 부르는 토요휴무일엔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다양하게 마련돼 있다. 나무곤충 만들기, 풍선자동차 만들기, 만화캐릭터 만들기처럼 학교나 학원에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프로그램들로 아이들에게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선사한다. 주민들의 요구나 계절의 변화에 맞게, 프로그램은 수시로 바뀐다. 2006년 새 학기를 앞두고 새 친구들 앞에서 자신을 개성 있게 소개하는 방법을 일러준 ‘또랑또랑 자기 소개하기’는 아이들과 어머니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시간이다. 새 학기를 맞는 아이들의 두려움까지 읽을 줄 아는 도서관. 주민들과의 끊임없는 소통으로 이곳의 배려는 날로 섬세해진다.

“한 분기의 강좌가 끝날 때마다 설문을 통해 지역주민들의 생각을 들어요. 새 강좌가 기획되면 일단 열어보고 주민들의 반응이 좋으면 안착시키죠. 시의성도 고려합니다. 가령 선물로 쓸 수 있는 천연비누나 앤틱 한지공예품은 선물할 일이 많은 5월 프로그램으로 마련하고, 낡은 실내화를 변신시키는 프로그램은 운동회가 끝나고 실내화가 더러워지는 11월에 하는 식이죠. 주민들과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눈도 점점 밝아져요.” 손귀숙 관장의 말이다.

한 해가 저물 무렵이면, 그 해에 열린 문화강좌의 작품들로 작은 전시회가 열린다. 그 즈음 이곳에 오면 자신의 이름이 걸린 작품 앞에서 환하게 미소 짓는 동네 주민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주민과 하나 되려는 명장도서관의 열정은 ‘도서관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1900세대가 사는 도서관 인근의 한 아파트. 이곳의 관리사무소 2층에 5,000여 점의 도서와 정기간행물을 기증해, 도서관에 오지 않고도 주민들이 독서문화를 누릴 수 있도록 했다. ‘찾아가는 서비스’는 또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어린이보육시설인 ‘새들원’을 방문해 동화 구연 프로그램을 여는 것. 독서치료도 독서치료지만, 달려가 안아주는 일만으로도 아이들의 마음엔 따뜻한 햇볕이 든다.

노인과 아이가 행복해지는 공간
종합자료실이나 디지털자료실에 가면, 돋보기를 쓴 반백의 어르신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그 가운데 이석희 씨는 일주일에 사흘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명장도서관의 오랜 단골이다.

“고등학교에서 화학공학을 가르치다 8년 전에 정년퇴임을 했어요. 퇴직하자마자부터 이곳엘 나오기 시작했지. 마음으로만 품어 왔던 영어공부도 하고, 평소 관심이 많았던 향토사 공부도 하며 시간을 보내요. 우리 같은 노인들이 시간을 보낼 곳이 마땅치 않은데, 이런 곳이 동네에 있으니 고마운 일이지.”

종합자료실 벽에 걸린 동양화 한 점을 그이가 수줍게 가리킨다. 탐스럽게 피어난 목단화 몇 송이.
이곳에서 5년 간 동양화를 배운 그이는 손수 그린 그림을 소장하지 않고 도서관에 기꺼이 기증했다. 덕분에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며 공부하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노인도 노인이지만, 어린이에겐 가히 ‘천국’이라 할 만하다. 아기자기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명장도서관의 어린이실. 아이와 엄마가 손을 잡고 들어와 나란히 책을 읽는 모습은 이곳의 ‘대표 풍경’이 된 지 이미 오래다. 주말이면 아빠들도 가세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가족 전체가 회원으로 활동하는 가족독서회 회원이 무려 900가족을 육박한다. 휴일이면 소파에 누워 리모컨을 돌리기에 바빴던 아빠들이, 책을 함께 고르고 함께 읽는 아빠로 변모해간다.

어머니 박정양 씨와 함께 수시로 도서관을 찾는 정원이(11세)는 이곳에서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을 배우기도 전인 10년 전부터 엄마의 손을 잡고 도서관엘 드나들었던 이 아이에게, 이곳은 집만큼이나 편안한 공간이다. 남매인 상백이(12세)와 나연이(10세)는 맞벌이 부모님이 퇴근할 때까지 이곳에서 책을 보거나 숙제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도서관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건전한 놀이방의 하나라는 걸, 두 아이는 간단하게 증명해 보인다.

“어머니들이 종종 먹을 것을 싸들고 오세요. 아이를 돌봐줘서 고맙다며 음료수세트를 들고 오는 분도 계시고, 함께 나눠 먹기 위해 삶은 고구마나 볶은 콩 같은 걸 간식으로 갖고 오는 분도 계시죠. 책을 읽는 곳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나누는 곳이기도 해요.” 남주은 씨의 목소리에, 어린이실 담당자로서의 행복이 가득 묻어 있다. 

딩동! 미래로부터 메시지 하나가 도착한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도서관이었어.” 이 동네에서 성장해 건강한 사회인이 된 아이들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귓가를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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