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넘고 물 건너 50년 사랑, 70년 우정 박현숙



경주 이씨의 집성촌으로 마을의 역사가 500년이 넘는 경북 의성군 안사면 중하리. 이곳은 마을의 역사만 오랜 것이 아니라 육순이면 ‘장정’이요, 팔순이나 돼야 ‘어르신’ 축에 드는 주민들의 삶도 오래되었다. 50년, 70년, 사랑과 우정을 지켜가며 사는 이곳 장수마을 어르신들을 찾아 서울아산병원 순회봉사팀과 MBC ‘느낌표’ 팀이 의료봉사를 떠났다.

“서울 사람들, 우리말을 잘 못 알아듣데?”
“말을 천천히 하면 돼. 그럼 그런대로 통해.”
경북 의성군 안사면 중하1리 마을회관 앞에서 이른 아침부터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 갈무리가 끝난 깻단이며 고춧단을 태워 모닥불을 지핀다. 경상도 남자 특유의 목석같은 표정이지만 어르신들이 주고받는 말에는 은근한 설렘이 묻어난다. 바야흐로 겨울이라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싼 산봉우리처럼 잔뜩 움츠러든 사람들의 어깨를 모닥불이 풀어준다. 특히 산골의 추위에 영 맥을 못 추는 도시사람들, 문화방송 ‘산 넘고 물 건너’ 진행팀과 아산병원 순회진료 봉사팀에게 어르신들의 배려가 담긴 모닥불은 요긴하다.

이상하게도 모닥불 주위에는 모두 남자뿐이다. 여자들은 다 어디 있느냐는 객의 질문에 어르신 한 분이 당연하다는 듯 “먼저 건강검진 받고 있지. 여자가 먼저 아이가?”하고 답하신다. 어르신의 설명은 이랬다. 여자들이 먼저고 그 다음은 남자 어르신, 그리고 맨 마지막이 당신 같은 장정들 순서라는 것이다. 35가구 52명으로 이뤄진 마을에서 예순을 넘기지 않은 이는 네 명뿐이고 나머지 모두가 육순, 칠순, 팔순이 넘었으니 이곳에서는 육순이면 자타가 인정하는 ‘장정’이다.

“우리 마을 역사는 한 500년 되는 기라. 경주 이씨 집성촌이고 예로부터 예의범절이 엄격한 마을이지. 나 어릴 적만 해도 어르신들이 ‘고개를 반듯이 들고 낯빛을 겸손히 가져라, 외지에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필히 절을 해라’하고 일일이 가르쳐주셨지. 격이 높은 선비도 많았어.”

기백 있는 선비의 풍모를 지닌 이상봉 할아버지(71)는 예의범절을 강조하는 마을문화를 소개한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마을 사람들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다니엘 ‘혜은이’와
엄정화 아나운서(?)를 만나는 기쁨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마을에서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라는 말은 남자에게 국한된 말은 아닌 듯싶다. 마을회관 안에 펼쳐진 진료실의 풍경은 깊은 물속처럼 조용히 흘러간다. 때문에 굵직한 바리톤 김형태 교수의 목소리는 더욱 선명하고, 아산병원 순회봉사팀에서 활동하고 있는 베테랑 이순선 간호사의 목소리는 다정하기 그지없다. 어르신들의 귀여운 손녀뻘인 오현진·조주영 간호사의 목소리도 봄날의 종달새 노래처럼 맑게 들려온다.

김형태 교수는 겨울철에 더욱 증세가 악화되기 쉬운 천식, 고혈압 등에 대한 주의사항을 상세하게 알려주어 노인들의 고민을 속 시원하게 풀어준다. 특히 눈길 낙상에 대비하여 평소 균형감각과 근력을 키워주는 가벼운 운동을 꾸준히 할 것을 가르쳐드린다. 김분이 할머니(69)는 오늘 안과 특별처방으로 어르신들께 무료로 안경을 선물해드리고 독감 예방주사를 놔 드린다는 말에 흥이 절로 났다.

“아이고, 이리 와서 건강검진 해주시는 것만도 고마운데 이를 우얄꼬-.”
오분남 씨(58)는 할머니께 더 놀라운 소식을 전한다.
“눈 검사하고 두 시간만 있으면 바로 안경을 만들어준다고 하네요. 신기하지요?”
아이처럼 좋아하는 할머니들 사이에서 “왔어요, 왔어!”하는 소리와 함께 진료실이 술렁거렸고 어르신들은 삼삼오오 동구 밖으로 향했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사람들을 직접 만난다는 기대감이 서린 얼굴들. 드디어 그들이 왔다. 인기배우 다니엘 헤니와 엄정화 씨는 어르신들의 손을 일일이 잡으며 인사를 한다. 먼 길 온 손님을 위해 어르신들은 빈 비닐하우스에 정성어린 시골 밥상을 차렸다. 구수한 보리떡과 김이 서리서리 나는 편육, 군침이 절로 도는 보쌈김치 접시가 바닥을 보이기 무섭게 다시 채워진다. 뜨끈한 된장국에 밥을 말아 게눈 감추듯 그릇을 비우고 보리떡까지 먹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을 어른들은 못내 기뻐한다.

개그맨 남희석, 배우 이영아 씨의 안내로 다니엘 헤니와 엄정화 씨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장상옥 할머니(68) 댁이다. 마침 김장을 담그고 계셨던 할머니는 갓 버무린 김치 속을 듬뿍 넣은 쌈을 입에 넣어주며 많이 먹으라고 하신다. 방금 밥을 먹고 온 이들이지만 김장쌈을 잘도 먹는다. 다니엘 헤니도 매운 김치를 맛있게 먹는다. 텔레비전에서 많이 본 반가운 얼굴, 그러나 할머니는 이들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다니엘 헤니는 자꾸 ‘혜은이~!’라고 부르고 엄정화 씨를 ‘뉴스진행을 잘 하는 예쁜 아나운서’가 아니냐고 하신다.



‘농띵이’ 남편과
‘곱단이’ 아내의 반 백년 넘는 사랑법

이상길 할아버지(72)와 전유목 할머니(71) 부부 댁에 다니엘 헤니와 엄정화 씨 일행이 들어섰을 때 두 분은 마당에서 무청 시래기를 갈무리하고 계셨다. 토담에 시래기를 걸어 말리기 위해 볏짚으로 새끼를 꼬던 내외가 버선발로 반기신다. 보자마자 한 켠에 쌓여있던 배추를 한 포기씩 안기시며 “올해 배추가 잘 됐어! 많이들 가져가. 시골 노인네가 뭐 변변히 줄 게 있어야지. 그래도 우리 배추가 참 꼬시다!”하고 너털웃음을 지으신다.

열여덟 열일곱 처녀총각이 화촉을 밝힌 지 쉰 네 해가 지났다. 첫날 밤 첫인상은 천양지차였다. “키도 자그마하이 디게 못났드라. 속으로 ‘저리 못난 사람이랑 우예 사노’했다 내가!”라는 할머니와 “고왔지! 족두리 쓴 모습이 선녀였지!”라는 할아버지. 손끝 야물던 할아버지는 몇 년 전부터 졸지에 ‘농띵이’가 되어버렸다. 말썽을 부리던 무릎관절이 심해져 수술을 받았는데 이후로는 일을 예전만큼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런 남편을 ‘농띵이’라고 부르는 할머니 마음을 알겠다. ‘당신은 환자가 아니다. 내 눈에 당신은 아직 건강한데 그저 농띵이질 하는 익살스런 사람이다’라고 여기는 마음을. 그 마음을 다 알기 때문일까? 할아버지 얼굴에는 육신의 고통을 안고 사는 이의 그늘이 없다. 좌중을 웃음바다에 빠뜨리는 재치만이 가득하다.

얘기꽃을 피우는 사이, 손녀딸 단비(13)가 학교를 파하고 돌아왔다. 초등학교 6학년인 단비는 어릴 적 부모님이 헤어지면서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자랐다. 구김 없이 밝은 성격에 속도 깊어 할아버지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는 착한 손녀는 다니엘 헤니 오빠를 보고 얼른 사인을 부탁하며 수줍게 웃는다. 아직 논의 볏짚을 묶지 못했다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도와 방송팀 일행이 논으로 갔다. 두 어른의 시범에 따라 방송 출연자들뿐만 아니라 스태프들도 두 팔 걷어올리고 볏짚을 묶는다. 거북이처럼 느린 솜씨지만 여럿이 힘을 더하니 300여 평 논의 볏짚 묶기가 1시간 여 만에 수월하게 끝났다.

70년 넘는 우정의 조건
올해 나이 아흔 넷인 김을선 할머니는 중하리 일대의 최장수 어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할머니의 정정함이다. 혼자 사는 할머니는 마당 텃밭에 파, 배추, 무 같은 채소를 손수 가꾸며 조석으로 신선하게 나물을 무쳐 드실 정도로 정정하시다. 할머니는 “누구한테 의탁하지 말고 내손으로 살아가겠다는 꼿꼿한 자존심이 있으면 장수한다”는 이색적인 장수비결을 들려주신다. 마실 온 김귀임(88)·김차연(89) 할머니와는 동서지간이지만 친구처럼 지내왔다고 한다. 세 분이 우정을 나눠온 세월은 70년이 훌쩍 넘었다. 눈, 귀가 밝은 김을선 할머니는 귀가 많이 어두운 두 친구들과 의사소통을 하는데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오랜 우정의 세월은 이심전심을 만들었을 터이다. 김을선 할머니는 “나만 고집하지 말고 벗을 먼저 생각하면 다툴 일도 서러울 일도 없다”며 우정의 비결도 알려주셨다.

이상준 할아버지(71)는 요즘 마음이 든든하다. 이날의 건강검진 결과, 담낭에 결석이 발견돼 서울아산병원에서 수술을 할 예정이었으나 정밀검사를 해보니 경과를 지켜보며 치료해도 좋겠다는 결론이 나왔던 것이다. 더구나 서울아산병원에서 6개월에 한 번씩 무료로 정기검진을 해주겠다니 안심이라고 하신다. 깍듯한 예의 속에 꼿꼿한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장수마을의 후예답게 할아버지를 비롯한 마을 분들 모두 내내 건강하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