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넘고 물 건너 MBC '느낌표' 제작팀과 영월 오지에 가다 박현숙



3월의 들머리, 강원도 영월 땅에는 춘설이 난분분하다. 일찌감치 봄을 들여놓은 마음은 춘설에서 흩날리는 매화 꽃잎을 본다. 영월군 신흥4리 마을회관 앞에서 반가이 객들을 맞이하는 노인들의 얼굴에도 꽃이 피었다. MBC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은 개그맨 김제동 씨와 이윤석 씨, 연기인 신애 씨가 마을회관에 들어서자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먼 길 찾아온 손자손녀를 맞듯이 반기신다. “먼 길 오시는 손님 반기는 눈이 꽃처럼 오시네!” 조영이 할머니(72)의 한 마디다. “참 이쁘네!”, “풍년이려나!” 그 말들 속에서 예순 해, 일흔 해, 여든 해 해마다 맞이하는 봄에서 새로움을 퍼 올리는 마음이 보인다. 깊게 주름 잡힌 얼굴과 고목나무 등걸 같은 손마디에는 해마다 새로워지는 마음이 새순처럼 움트고 있는 것이다. 눈꽃이 그리 예쁘냐는 객의 질문에 할아버지 한 분은 “나이는 들어도 마음은 이팔청춘”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으신다.

원스톱 시스템, 병원 하나가 움직인다
서울아산병원의 의료봉사팀이 마을을 찾는다는 소식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어젯밤부터 설레었고, 아침 댓바람부터 길을 나섰다고 한다. 걸어서 20분 오셨다는 분도 있고 부부가 나란히 한 시간 정도 고개를 넘어 오셨다는 분도 있다. 마을버스도 뜸한 오지인데다가 만만치 않은 병원비 부담으로 몸 여기저기에서 고장신호를 보내도 ‘늙어지면 으레 그런 것을’하고 말았다는 노인들에게 의료봉사팀은 고맙고도 반가운 의사선생님이다. 이봉순 할머니(69)는 커다란 버스에 병원이 통째로 들어있다는 설명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버스 안에서 가슴 사진도 찍고 피도 검사하고 간수치도 알아내고 한다는 말에 할머니는 거푸 정말이냐며 되물으신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참 고마워하세요. 그 모습 볼 때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은 얼마나 축복인가 하는 생각도 하고요.” 달마다 13일씩 이뤄지는 서울아산병원의 오지 순회진료. 5명의 의료봉사팀을 이끌고 있는 이순선 간호사는 지난 89년 개원과 함께 시작한 순회봉사활동에 참여해오면서 조금씩 인생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수십 년 세월 먼저 인생을 살아온 노인 분들은 그대로 삶의 교과서였다.

서울아산병원 외과전문의 김형태 교수를 비롯해 두 명의 간호사와 한 명씩의 임상병리사와 방사선사가 호흡을 맞추자 소박한 마을회관 안에 금세 병원이 차려졌다. 접수실, 진료실, 조제실이 제법 그럴듯하다. 이순선 간호사가 접수를 맡고 오현진 간호사가 혈압을 재고, 김형태 교수가 진료를 하면 노인들은 병원차량으로 이동하여 X레이 촬영, 간기능 및 혈액과 심전도 검사를 하고 검사결과를 토대로 김형태 교수의 진단을 받고 약 등을 처방받는다.

검사결과에 따라 이상질환이 발견되면 2차 병원을 안내하여 노인들이 진료를 받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하고 있다. 그야말로 원스톱 시스템이다. 특히 5분여 만에 현상되어 나오는 X레이 사진이나 20여 분만에 결과가 나오는 혈액, 간기능 검사는 선진국에서도 부러워하는 첨단 장비다.

50여 명의 노인들은 오랜 기다림 없이 바로바로 받는 검진이 신기하다. 게다가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흥겨운 개그맨 이윤석 씨와 선녀처럼 고운 탤런트 신애 씨가 살가운 피붙이처럼 부축해 드리며 안내를 하자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보였다. 박의월 할머니(78)는 “내 이 수십 년 묵혀온 가슴 울렁증하고 속앓이가 이 사진에 다 찍혔다네! 이렇게 금방 사진이 나왔어요”하며 참 좋은 세상 만났다고 좋아하신다. 퉁명스럽게 시작하다가 말꼬리에서 특유의 억양으로 마무리 짓는 강원도표 진한 사투리 속에서 할머니의 풋풋함이 전해 온다.



노인은 젊은이의 미래
“도시나 시골이나 노인들이 앓는 질환은 비슷해요. 퇴행성관절염, 고혈압, 당뇨 등입니다. 그런데 도시 노인에 비해서 시골 노인들의 질환관리가 제대로 안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무래도 의료서비스를 받는 여건이 좋지 않죠. 5년간 의료봉사팀과 함께 하면서 이런 현실이 많이 안타까웠어요. 이러한 문제는 더욱 심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제일 고령화가 빠른 나라라고 합니다. 이제 노인문제는 당면한 사회문제이기도 해요. 노인은 젊은이의 미래입니다. 우리가 노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김형태 교수는 의료서비스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시골 노인들에게 사회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특히 교통이 불편하고 젊은이들이 떠나버린 오지의 노인들에게 공동의 책임의식이 절실하다고 한다.

속속 도착해 진료를 받는 노인들 얼굴에는 설레는 빛이 역력하다. 이옥자 할머니(71)는 친구인 박금출 할머니(73)를 가리키며 “이 할매는 주사를 아주 큰 걸로 놔주라고 얘기해야 겠네!”라고 해 좌중을 웃음바다에 빠뜨렸다. 박금출 할머니는 그런 친구를 곱게 흘겨보다가 이내 쫓아가서 “너도 같이 맞자!”며 팔짱을 꼈다. 기다리는 사이 경로당의 흑판에 글씨를 써 보기도 하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노인들의 얼굴에서 동심이 읽힌다.

부부가 함께 검진을 받은 전석용 할아버지(75)와 이연호 할머니(69)는 자신의 검사결과보다 남편의, 아내의 검사결과 살피기에 여념이 없다. 할머니는 아직도 젊을 때 기분으로 술을 많이 하는 할아버지의 건강이 걱정이고, 할아버지는 수년 전 위암수술을 받아 10kg이나 살이 빠진 할머니의 기력이 궁금하다. 검사결과 다행히 커다란 문제는 없는 것으로 나왔다. 다만 절제 있는 생활을 하고 운동을 꾸준히 하라는 의사선생님의 조언이 나왔다. 최고의 의사는 마음에 있다고 했던가. 서로 잘 먹고 운동하고 술을 줄이자며 웃는 부부의 모습이 흐뭇하다.

노인, 노동이 아닌 운동을 하자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허리와 다리 통증을 호소하신다. 젊은이가 떠나버린 농촌에서 힘겨운 농사일을 마다않고 해온 노인들에게 당연한 병이다. “운동이 필요하다”는 김형태 교수의 말에 “제가 움직이기는 많이 움직여요. 꼭두새벽부터 밭에 나가고 하는데요? 그런데도 늘 어깨가 뻣뻣하고 허리도 펴기가 힘들어요”라고 답하는 황장순 할머니(75). 김 교수는 이런 시골 노인의 현실이 안타깝다. “어르신, 어르신이 하시는 것은 운동이 아니라 노동이에요. 팔을 바깥쪽으로 이렇게 크게 원을 그려 보세요. 이것 보세요. 잘 안되시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시간 나는 대로 그렇게 운동을 해주세요. 그래야 어깨가 나아집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진료실을 나온 할머니는 “조금 움직였는데도 시원한 것 같아요. 이게 운동이래요. 오늘 의사선생님한테서 좋은 것 배웠네. 운동, 운동!”하며 순박하게 웃으신다. 작은 정보 하나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은 얼마나 소중한가. 그런 마음에 노년이란 하루하루 늙어감이 아니라 하루하루 배우는 것이 늘어감을 의미할 터이다. 새벽부터 논밭으로 나가 허리 한 번 펴지 않고 일해 오신 할머니에게 아직 운동은 사치스런 것으로 느껴지시는 것일까. 조금 전에 배운 팔운동을 익히시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수줍음이 배어 나온다.

아침 11시 무렵부터 시작한 50여 명에 이르는 환자들의 진료는 오후 4시 즈음해 끝났다. 그 동안의 궁금증이 훤히 풀린 노인들, 원하던 진료를 받은 노인들, 미처 알지 못한 질환을 알게 된 노인들은 의료진들에게 허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봉사팀은 진료 받은 노인들께 찜질팩을 선물하며 평소 꾸준히 건강관리에 신경 써 줄 것을 당부했다.

산 넘고 물 건너 진료의 손길을 전하는 ‘움직이는 병원’ 의료봉사팀. 그들의 따뜻한 손길에서 오지 노인들은 아픈 몸을 치료 받으며 마음까지 치유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