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병원이 있는 풍경 산골 정서 담뿍 안은 ‘내 집’ 같은 병원 이선희



깊은 산 어디쯤 산신령이 살고 있을 것처럼 산들이 첩첩하고 깊다. 공작산 팔봉산 아미산 가리산 계방산 등 나름의 자태를 뽐내는 산들이 서로 어깨를 겯고 우뚝우뚝 서 있다. 제주도에 버금가는 면적이라지만 87%가 산지인 강원도 홍천 땅. 56번 국도를 따라 펼쳐진 홍천의 산들이 눈부시게 청명한 쪽빛 하늘 아래로 골짜기마다 하얀 안개구름을 두둥실 피어 올리며 길손을 맞는다. 늦가을이 되면 저 산들, 단풍 불이 붙어 오색으로 장관을 이루리라.

서석면 생곡리에서 샘솟은 홍천강도 굽이굽이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며 흘러간다. 산이 쪼개어 놓은 계곡과 물줄기를 따라 7만여 명의 주민들이 점점이 흩어져 삶을 일구는 홍천의 중심, 읍내로 들어서자 이번엔 무궁화 꽃이 지천이다. 가로수며 군 상징꽃까지 무궁화로 정할 정도로 이 고장 사람들의 무궁화 사랑은 남다르다.

한서 남궁억 선생(1863~1939)은 만년에 고향인 홍천 보리울로 내려와 학교를 세우고 뒤뜰에 무궁화 묘목을 몰래 키웠다는데 그가 총독부의 눈을 피해 전국에 뿌렸다는 무궁화 70만 그루가 다시 모두 이곳에 집결한 듯하다. 한서 선생은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황성신문 사장을 지냈으며, 갑오개혁 내각에서 토목국장을 지내는 동안 탑골공원과 독립문을 만들었다. 군민들이 지금도 한서 선생을 깍듯이 스승으로 받들고 있는 징표는 올해로 28회째를 맞은 한서문화제나 홍천읍 연흥리의 무궁화 공원, 서면 모곡리의 한서기념공원에서도 잘 엿볼 수 있다.



무궁화 공원을 지나 홍천 읍내를 관통하는 홍천강 상류, 비교적 번화한 시가지를 낀 강가 녘에 홍천아산병원이 자리하고 있다. 읍내에서 가까워 그런지 자전거를 타고 병원에 출입하는 풍경도 눈에 띈다.

“병원이 문 연 1988년만 해도 주위가 모두 논밭이었는데 어느새 시가지로 변했네요. 지역 정서에 잘 맞는 친근한 병원으로 다가서고자 개원 이래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홍천은 벌써 초고령 사회로 진입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군에서 하나뿐인 종합병원이지만 출산하는 산모가 이틀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하지요. 군인들 외에 젊은이들 보기도 힘들어요. 신장병으로 고생하는 노인들이 많아 내년에 인공신장실을 운영하려고 투석전공의도 영입했습니다.”

고령 인구가 많고 거개가 산지라 비얄밭을 일구는 농부들 중에는 퇴행성 관절염에 시달리는 이가 많고 강과 계곡 주위 주민들은 호흡기와 순환기 질환이 많다고 강성열 관리부장은 전한다. 환자수가 가장 많은 곳은 내과, 다음이 정형외과 신경외과 순. 얼른 진료를 마치고 논밭으로 달려가고자 하는 농부들은 대개 첫차를 타고 와 오전 진료를 받기 때문에 9시 30분에서 11시 30분까지가 병원이 가장 바쁜 시간이란다. 11개과에 127병상 규모 홍천아산병원에서는 이원혁 원장(53) 외에 전문의 11명과 파견의 및 간호사 등 70명의 의료진이 주민들 건강을 돌보고 있다. 병원 규모는 아담하지만 홍천 뿐 아니라 인제·양구지역에 주둔하는 군인들의 건강검진은 물론 초·중·고 1년생들의 신체검사기관으로 청소년 건강도 책임지는 등 많은 일들을 이뤄내고 있다.

병원장을 필두로 의사들은 진료가 끝나는 5시30분 이후 월·목요일에 근처 노인전문 요양병원을 찾아 무료진료를 펼치고, 직원 모두가 동그라미·햇빛촌·무지개 등 5개의 봉사팀을 꾸려 저소득층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장애인을 돌보는 일에 솔선수범하고 있다. 간호사들은 지난해 4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셋째 일요일마다 하늘공동체나 사랑의 집 등 무의탁 노인시설에 의료봉사를 나간다.

주민들의 친근한 벗
이처럼 지역주민들과 서로 소통하는 병원의 토대는 초창기인 1989년부터 진료부장으로 일하다 3대 병원장으로 부임한 신경외과 전문의 이원혁 원장이 마련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추석이나 명절이면 환자들에게 선물을 돌리는 병원장인 그는, 병원비도 없고 아무도 데려갈 사람이 없는 자신의 환자 허만철 씨(54)를 정성껏 돌보며 입원한지 3,000일이 된 그를 위해 케이크를 사서 축하 파티를 해주자고 제안하는 사람이다. “돈이 있든 없든 모든 환자는 진료 받을 권리가 있지요. 모든 환자가 다 제 가족이나 마찬가지구요.”

환자들을 위해 화장실 칸칸마다 긴급 버튼을 매다는 세심한 손길, 청소하는 아줌마까지 친절한 안내역을 자청하는 병원…. 이런 정성 때문에 아산병원을 ‘내 집 같이’ 친근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홍천에는 무척 많다.

해발 887m 공작산 수타사 가는 길목, 동면 덕치리에서 김현섭 씨(58) 내외는 홍천이 자랑하는 5대 명물중 하나인 인삼농사를 짓는다. 홍천 토박이인 김씨는 당뇨병을 앓는 부인 박복자 씨의 치료를 위해 아산병원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벌써 20년 됐지요. 고추를 따다가 집사람이 픽 쓰러져서 아산병원에 실려 간 게…. 그 전부터 좀 어지럽고 메슥거린다고 해서 체했거나 맹장염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당수치가 400이 넘게 나왔다고 해 깜짝 놀랐죠.”

박씨는 그 때부터 매일 스스로 인슐린 주사를 놓으며 당을 조절하고 있다. 당뇨합병증으로 서울아산병원에서 귀 수술을 3차례나 받았지만 귀마개를 끼운 듯 귀가 좀 멍멍한 걸 제외하면 건강이 아주 좋단다. 3개월 된 손자의 재롱을 보는 재미에 더 몸이 좋아진 것 같다며 얼굴 가득 순박한 미소를 담는다.

밭에서 갓 따온 참외를 깎아내는 내외를 뒤로 하고 내친 김에 수타사로 발길을 내딛는다. 신라 원효대사가 우적산에 창건한 일월사(日月寺)를 세조 3년 공작산이 알을 품은 듯한 명당자리인 이곳에 옮겨 짓고 용이 승천했다는 큰 못이 근처에 있어 물 수(水) 떨어질 타(墮) 자를 써 수타사라 이름 붙였다는 절. 그런데 이름 때문인지 용소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이 자꾸 생겨나 순조 11년 절 이름을 목숨 ‘壽’ 비탈질 ‘陀’ 라고 바꾼 뒤부터 그런 일이 없어졌다는 사연을 지닌 절이다.

수타사는 우리나라 국어연구에 큰 공헌을 한 사찰로 유명하다. 사천왕상의 하나인 지국천왕상 속에서 세조 때 지은 <월인석보> 17, 18권 원본과 법화경 화엄경 등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뛰어난 장인으로 칭송받던 사인비구스님이 제작한 수타사 동종은 보물 11호로 지정돼 있다.

천혜의 자연과 의기 따뜻한 사람들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을 바라보며 남면 양덕원리로 길을 돌린다. 혈압 혈당 체크기와 검사기록표 등을 챙겨 의료봉사를 하러 가는 이주남·강정희 간호사의 얼굴은 가을 들녘처럼 평화롭다. 꼬불꼬불 산길 아래 고즈넉이 들어선 베델선교회 무의탁노인시설 ‘사랑의 집’에 들어서자 마당에 있던 한 할머니가 “하이고 반가와라! 늦은 시간에 웬일이여!” 하며 간호사들을 와락 껴안는다.

할머니는 나팔을 매단 듯 방문마다 연통을 돌리고, 어르신들은 마당 앞 정자로 옹기종기 모여든다. 두 간호사는 노인들의 이름과 병력을 모두 알고 있는 듯하다. “박영숙 할머니! 일전에 드린 혈압 약 잘 드시고 계시죠?” 에구 그동안 몸이 더 좋아지셨네. 운동 열심히 하셔야겠어요!” 세세한 당부와 체크가 쉼 없이 이어진다.

봉사를 마치고 나서도 쉬 발걸음을 떼지 못하던 홍천 태생 이주남 간호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전에 봉사 갔던 하늘공동체에서 할머니 한 분이 그러시더군요. 교도소에 있더라도 자식이 있었으면 좋겠다구요. 기도를 하려고 해도 그 대상이 빨리 눈앞에 떠오르지 않아 슬프대요…. 그 후로 이 분들의 외로움이 왠지 가슴에 맺혀서 참 아프네요.”
산을 타고 내려온 정기가 사람들을 인자(仁者)요, 의인(義人)으로 만드는 것일까. 남궁 억 선생을 비롯해 3.1 운동 때 태극기를 흔들다 목숨을 잃은 민병태 민병숙 형제 열사, 부하들을 살리고자 자신을 희생한 강재구 소령 등 홍천이 자랑하는 인물들의 따뜻한 의기가 이 지방 모든 사람들의 성정인 것 같다. 그래서 조선조의 문호 서거정도 <학명루기>에 “홍천은 산과 물이 둘러 있고, 깊고 궁벽한 곳에 있으면서 잘 다스려졌다. 백성들의 풍속은 순박하고 소송은 적어서 수령 노릇하는 즐거움이 있다”는 기록을 남겼으리라.

‘후미진 산골에 땅도 메말라서 논에 볍씨 한 말을 심어야 겨우 10여 말 거둔다’고 할 만큼 깊고 궁벽했던 산골 홍천은 이제 빼어난 경치 덕분에 새롭게 기지개를 켜고 있다. 대명리조트, 오션 월드, 홍천 온천을 비롯해 레저 붐을 타고 낚시꾼과 등산객을 위한 펜션단지와 휴양림이 곳곳에 들어서고 있다. 암반수에서 퍼낸 물로 맥주를 빚는다는 하이트 공장, 미래의 에비앙 생수를 꿈꾸는 화촌면 굴운리 약산샘물 공장, 홍천강 수중보 등 자연 환경자원을 이용한 산업시설과 함께 군부대가 유난히 많은 환경을 지역 상권과 연결시키려는 구상도 활발하다.

수심이 얕고 물이 차지 않은 홍천강에서 꺽지 메기 눈치 빠가사리 등 민물고기를 잡아 끓이는 즉석 매운탕. 여름 끝 무렵 찰옥수수 축제기간이 끝나면 56번 국도를 잇는 전봇대마다 치마를 입힌 듯 줄줄이 옥수수를 매달아 널어 말리는 모습은 이곳에서만 접할 수 있는 맛과 멋이다. 개발이 되더라도 산골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과 후덕한 인심은 때를 덜 타기를, 그래서 속세에 찌든 눈과 마음의 때를 깨끗이 씻어주는 홍천으로 남기를 기원한다.

* 지난 2005년 여름호부터 연재해온 ‘아산병원이 있는 풍경’은 영덕, 정읍, 강릉, 보성, 보령병원에 이어
   홍천병원을 마지막으로 그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