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병원이 있는 풍경 보성아산병원 박인숙



봄 내음 따라 전라남도 보성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설렌다. 전국적으로 이름 높은 보성 녹차의 향기와 서편제 보성 소리의 애절하고도 도도한 흥취에 푹 젖노라면 도시에서 찌든 몸과 마음의 묵은 때가 훌훌 벗겨질 텐데. 살랑 사알랑, 차창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얼굴을 간지럽히며 설렘을 부추긴다.

보성 읍내를 벗어나 바다가 있는 회천면을 향해 ‘봇재’라는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갑작스레 눈이 탁 트인다. 연녹색 이랑들이 산등성이에 가지런히 수놓은 아름다운 그림, 차밭. 470m 높이 활성산 자락이 온통 차밭이다. 바다 같은 차밭 끝자락으로 아득한 눈길을 주니 거기에 또 푸르게 넘실대는 진짜 바다가 있다. 한 가슴에 두 바다를 품으려니 절로 깊은 숨이 쉬어진다.

자연의 선물과 그늘 보성 녹차의 이름을 드높인 주역은 산과 바다 그리고 호수다. 남해 바다에서 습기를 품고 불어오는 따뜻한 해양성 바람과 주암호에서 올라오는 습기가 일림산, 제암산 등으로 둘러싸인 육지의 대륙성 기후와 만나면서 보성 지역에는 안개 끼는 날이 연중 100여 일이나 된다. 안개가 차나무에 적당한 수분을 공급하고 자연차광으로 그늘을 마련해 맛과 향 좋은 차를 키워내는 것이다.

“차 밭에서 물주는 스프링클러 못 보셨죠? 자연은 보성에 녹차라는 큰 선물을 줬는데, 주민들에게 안타까운 병도 줍니다. 안개가 잦은 탓에 폐쇄성폐질환 환자가 많아요. 네 사람에 한 명꼴로 노령화 인구 비율도 높습니다. 들과 바다에서 고된 노동을 해온 노인들은 고혈압 당뇨 노인성백내장은 물론 허리가 굽은 척추병증, 굳은살 같은 피부변형까지 여러 가지 노인성 질환을 앓지요.”

보성아산병원장인 내과전문의 김우열 박사(65)는 보성 지역에서 유일하게 입원치료가 가능한 110병상 규모의 2차 진료기관인데도, 소아과와 산부인과가 없을 만큼 인구 고령화가 심각하다고 걱정한다. 28년 전인 1978년 11월 개원했을 때만 해도 15만여 명이던 인구가 3분의 1로 줄면서 젊은이들이 대거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아산재단 설립자인 고 정주영 이사장은 농어촌 의료사각지대를 물색해 78년 7월 전북 정읍에 첫 아산병원 문을 열고 넉 달 뒤 보성에서도 개원을 했습니다. 부지도 일부러 도심이 아닌 외곽지역에 잡아 주민 중심의 의료센터가 되게 했지요. 정읍병원 개원 준비 할 때부터 아산재단과 연을 맺었는데, ‘우리 사회의 가장 불우한 이웃을 돕는다’는 이사장의 높은 뜻을 날이 갈수록 절감하게 되는군요. 그런 만큼 내 가족이나 친척처럼 환자를 대하고자 직원 80여 명이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내과 정형외과 안과 등 7개과가 있는 보성 아산병원의 노인환자 비율은 60%에 달한다. 내과는 고혈압 당뇨병 폐쇄성폐질환이 도합 61%, 안과는 노인성백내장만 42%다. 통증의학과엔 디스크를 포함한 척추병증과 어깨를 잘 못 쓰는 유착성피막염이 76%를 차지한다. 평생 자식들 뒷바라지를 했건만 노년에 홀로 남은 독거노인들도 많아 병원이 할 일은 병 치료에서 그치지 않는다.


농어촌 맞춤형 서비스 농어촌 소외 지역민의 건강 지킴이로 오랜 세월 신뢰를 쌓아온 보성아산병원은 지난해부터 두 가지 맞춤형 서비스를 새로 선보였다. ‘진료 예약제’와 ‘가정방문 간호제’다.

이 곳의 진료예약제는 특이하다. 웅치면과 득량면 등 10개 면에서 보성 읍내로 향하는 버스는 하루 2~3차례다. 터미널과 기차역에서 병원까지는 무료로 병원버스가 다닌다. 하지만 노인들에게 1,000~2,000원의 교통비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닐뿐더러, 둔해진 몸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불편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사전에 진료를 예약하면 병원 버스가 마을 단위로 돌아다니며 환자를 직접 데리고 온다.

“시골 어르신들은 정말 소박하세요. 진료를 예약하면 모셔 오고, 끝나면 모셔다 드린다고 누누이 설명해도 약속 못 지킬까봐 안 하려고들 하세요. 예약이야 변경하면 되는 건데….” 선일석 관리부장의 안타까움은 곧 어르신들을 향한 애정이다.

가정방문간호제는 입·퇴원을 반복하며 거동이 불편한 만성 환자들을 전문 간호사가 집으로 찾아가 돌보는 시스템이다. 혈압과 당뇨 같은 간단한 체크기와 상처처치 세트 등을 실은 경승용차를 간호사가 직접 운전해 집집마다 방문한다. 40~50명의 환자를 주 2~3회씩 찾아가 의사 처방에 따라 주사도 놓고 카테타(소변줄)도 갈고 투약도 하면서 퇴원환자를 지속적으로 관리한다.

봄볕 따사로운 들녘과 마주한 율어면 문양리의 한 농가. 폐쇄성폐질환을 앓는 허노순 할머니(90)는 새액쌕, 밭은 숨소리를 내면서도 반가운 얼굴로 간호사를 맞이하신다. “할머니가 약을 잘 안 드셔서 오늘은 기침 안정시키는 주사 처방이 나왔어요. 어지럽고 힘드시더라도 약은 꼭 드셔야 해요. 안 그러면 다시 입원해야 할지도 몰라요.” 곽선희 간호사(37)의 협박 어린 당부에 할머니는 “시키는 대로 할께. 속이 자꾸 야분대서(쓰려서) 안 먹었지.”라며 어린아이처럼 응석을 부리신다.

청진기로 기침 소리 확인하고, 잘 안나오는 혈관을 애써 찾아 링거 주사액도 꽂았다. 근육 주사까지 일은 다 마쳤는데 발걸음이 안 떨어진다. 혼자 사는 할머니가 터진 보일러를 어쩌지 못해 얼음장 같이 차가운 방 대신, 볕 잘 드는 처마 밑 의자에 앉힌 채 주사를 놔야 했다. 비닐 막으로 바람 한 올이라도 더 가려주려고 애 쓰는 간호사 손길에 애잔함이 묻어난다.

“입원을 권하면 혹시 집 밖에서 임종할까봐 꺼리면서도, 집에서 숨 멎었는데 며칠동안 아무도 모를까봐 그것도 걱정이시죠. 집집마다 살아온 내력이 소설책 몇 권씩은 될 겁니다. 찾아뵙고 이리 저리 살펴보며 이야기 들어주는 걸 제일 고마워하세요. 오늘 아침에도 어렸을 때 버림받고 아등바등 살면서 자식 결혼시키고 조금 살만해 지니까 암에 걸린 환자 댁에 가서 같이 한참 울다 왔습니다.”

주민들의 형편까지 세심하게 돌보는 보성아산병원은 양로원과 병원을 합한 개념의 ‘요양 병동’도 의욕적으로 추진 중이다. 간병인의 돌봄과 의료진의 관리를 함께 제공해 혼자 지내기 힘든 어르신들이 편히 투병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남도가 빚은 삶과 예술 희노애락(喜怒哀樂) 네 글자에 과연 우리네 삶이 다 담겼을까. 보성은 삶의 굽이굽이를 고유의 가락에 담아 기쁨과 슬픔 너머로 승화시킨 판소리의 고장이기도 하다. 소리꾼들의 시린 애환을 아름다운 남도 풍광에 담아냈던 영화 ‘서편제’의 무대가 보성이고, 조상현 성우향 성창순 등 명창들이 서편제 비조인 박유전의 제자 정응민 명창으로부터 혹독한 배움을 다진 터전이 회천면 도강마을이다. 부드러우면서도 구성지고, 소리 끝을 길게 이어 애절한 맛이 짙은 서편제는 음담패설을 자제한 사설로 품격 높은 소리를 지키려 한 보성 명창들에 의해 ‘강산제 보성소리’라는 또 하나의 큰 맥을 이뤘다.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맡기고 상인들 배에 오른 심청이가 어디선가 “아버지~!” 소리쳐 부를 것만 같은 회천면 율포리 바닷가. 호수같이 잔잔한 득량만의 바다가 쏟아지는 햇살을 은비늘로 튀겨내며 녹차 해수탕과 맛난 생선회를 찾아온 관광객들을 맞는다.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율포 해안에서 횟집 ‘일억조’를 운영하는 박명부 씨(54)는 2년 전 생계의 원천인 그 바다와 영영 이별할 뻔했다. 알레르기 특이 체질인 줄 모르고 ‘위장에 좋다’는 친구들 권유로 옻닭을 먹은 게 원인이었다.

“서울 노량진과 인천 수산시장에 생선을 보급하느라 길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제때 밥을 못 먹는 일이 많았어요. 위가 쓰리고 안 좋은 것 같기에 옻닭을 먹은 건데 숨을 쉴 수가 있어야지요. 응급실에서 일단 호흡을 되살리고 내시경 검사를 했어요. 의사 선생님 말이, 나처럼 위 벽이 온통 피로 범벅된 사람은 처음 봤대요. 그러고도 암에 안 걸린 게 천만다행이라더군요. 중환자실을 거쳐 보름이나 입원했었어요.” 마늘이며 생선 등 고장에서 나는 좋은 음식을 먹은 덕분인지 나중에 조직검사를 세 번이나 했는데 암은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가까운 곳에 있는 좋은 의료진은 건강한 삶의 필수조건이다.

향기와 색의 축제 싱그러운 향을 풍기며 혀와 목에 달콤한 맛을 새기는 녹차는 겨울을 이기고 제일 먼저 돋아난 차 잎을 곡우(4월 20일) 전에 따는 우전차(雨前茶)를 으뜸으로 친다고 한다. 다음이 곡우차(穀雨茶), 곡우가 지난 뒤 참새 혀 모양의 잎을 따는 작설차 (雀舌茶) 순이다.

관광객들도 차 잎을 직접 따 볼 기회가 있다. 올해로 32회째인 ‘보성 다향제’. 5월 6~9일 사이 보성에서는 방금 딴 차 잎을 덖어 차를 만들고, 떡이며 완자찜 같은 요리도 해보고, 100만평 넘는 산이 온통 철쭉으로 붉게 물든 일림산에서 쪽빛 바다를 내려다보며 꽃길을 걷는 등의 축제를 마련한다.

언젠가 일림산 철쭉꽃밭을 걸어보리라, 소망을 품고 득량면 오봉리로 향한다. 탁 트인 득량벌과 그 너머 득량만 바다를 앞으로 안고, 뒤로는 오봉산 자락으로 병풍을 친 강골마을에 고풍스런 한옥 30여 채가 조신하게 앉아 있다. 마을 중앙의 이용욱 씨 자택을 비롯해, 아름드리 동백과 벚나무 숲이 연못과 정자와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이뤄낸 열화정(悅話亭) 등 네 채가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된 곳이다. 보성군은 집집마다 수백 년 묵은 이끼가 오랜 세월을 전해주는 이 아름다운 마을을 민속마을로 조성해 녹차, 판소리와 함께 우리 전통문화를 알리는 관광명소로 가꿀 예정이다.

들과 바다에서 풍요를 건지며 학문을 논하고 예술을 가꿨던 남도사람들의 정취가 대숲을 일렁이는 바람에 묻어온다. 서로 남 탓하지 말고, 작은 기쁨 소중히 여기면서 덕을 나누라고 속삭이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