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병원이 있는 풍경 영덕아산병원을 가다 류인호


이끼꽃 핀 기와 마을, 선비들의 터
‘옛날 태평스럽던 시절에 주민들은 살림살이가 넉넉했고 송사는 간단하였다. 집집마다 거문고를 갖고 있고 그 줄을 고르는 솜씨가 빼어났으며, 노래는 맑고 춤은 아름다웠다. 정자와 누대가 어울려 선 풍경은 마치 선경을 닮았다.’
조선 초기의 학자 권근이 영덕에 귀양을 왔다가 남긴 <수루기>라는 책에 그려진 영덕의 모습이다. 하지만 거문고의 줄에서 흘러나오던 그 아름답던 노래들은 이제 수백 년의 세월 속으로 사라지고 다만 창수면 인량리에 1602년(선조35년) 재령 이씨의 후손인 운악선생이 후진양성을 위해 지은 충효당(忠孝堂) 지붕, 검은 기와에 기억처럼 핀 하얗고 푸른 이끼꽃과 마당에 오백년을 한 해처럼 서 있는 은행나무나 그 노래와 풍경들을 기억하고 있는 듯 했다. 그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아기 손바닥 같은 푸른 잎으로 박수를 치고 있는 것을 보면. 영덕아산병원을 찾아가는 길, 그 오래 된 기와집 충효당에 들러 한쪽 마루에 걸터 앉는다. 기억 속에서 400년 전의 거문고 선율이 햇살보다 먼저 마루에 내려앉는 고택의 담 밖으로 보이는 너른 들판에는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들이 황금물결로 춤추고 있고, 집과 집 사이의 텃밭에는 하얀 무꽃들이 햇살을 받으며 서 있다. 그리고 담 안쪽에는 담을 따라 부지런한 집주인이 심어놓은 모란이며 석류나무들이 저마다 꽃을 피우고 있다. 며칠 후 열리는 문중 행사를 위해 집 단장이 한창이던 집주인이 잠시 일손을 멈추고 객들에게 마을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을의 땅 기운이 좋아 예부터 많은 학자들이 나오고 근래에도 박사가 열댓 명이 나왔단다. 하긴 고려 말 대학자 이색의 외가가 이곳 영덕이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왕자의 난 때 방원에게 죽은 남은, 예종 때 스물일곱 살로 병조판서에 오른 남이, 생육신 남효온,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로 시작되는 시조로 유명한 숙종 때의 영의정 남구만이 모두 이곳 영덕 사람이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닌 듯 했다.

이처럼 영덕은 충효당이 자리잡고 있는 창수면 뿐만 아니라 축산면, 병곡면, 영해면에 걸쳐 훌륭한 선비들이 터를 잡고 살던 반촌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하여 울진, 청송, 영양 지방의 농산물과 주변 해안 마을의 해산물들이 모여들어 경상북도에서 두 번째로 큰 장이 영덕의 영해면에 설 정도였으니 이곳의 사람들이 살림살이가 넉넉했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고, 살림살이가 넉넉했으니 인심이 후해 송사가 간단하고 집집마다 거문고 타며 노래 부르는 일이 잦으니 그 솜씨가 아니 빼어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산 좋고 물 좋아 인심 좋고 살기 좋은 곳이 바로 영덕이었던 것이다.


칠순의 나이에 산을 오르며 벌을 치는 이병욱 옹
영덕의 그런 풍요로움과 넉넉함은 그러나 산업화가 시작된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하게 쇠락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농산물인 복숭아도 늘어난 생산량에 비해 수요가 따르지 못해 가격이 떨어졌고, 영덕 대게도 어획량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러다 보니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대부분 도시로 떠나고 이제 마을에는 노인들만이 남아서 힘겹게 농사를 짓는 실정이 된 것이다. 옛날의 영화는 사라지고 당시 우리나라의 여느 농어촌과 마찬가지로 영덕도 대도시에 비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상대적으로 낙후되고 소외된 지역으로 변해가고 있다. 사정이 그렇고 보니 70년대 당시만 해도 영덕군의 주민들에게 제대로 된 의료서비스란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남의 이야기였다. 그런 그들에게 1979년에 믿기지 않는 놀라운 일이 생겼다. 영해면에 영덕아산병원이 개원을 한 것이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지요. 아픈 몸을 끌고 그것도 비포장길을 하루 종일 가서 대구에 있는 병원에서 치료받고 다음 날에나 돌아올 수 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렇게 1박 2일이 걸려서 병원에 다니던 이곳에 아산병원 같은 큰 병원이 들어왔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었겠어요. 아프지 않아 본 사람은 몰라요. 자기가 편리하게 치료를 받아 본 사람만이 그 소중함과 감사함을 절감하지요.”

영해면에서 40년 째 양봉업을 하며 세 번의 큰 수술을 영덕아산병원에서 받은 이병욱(74세) 옹은 지금도 자신이 건강하게 높은 산속으로 벌을 치러 다닐 수 있는 건 모두 영덕아산병원 덕이라고 말한다.

“의료보험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아산재단에서 의료보험혜택까지 주며 치료를 해주었으니 시골 사람들에게 그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겠어요.”

영덕아산병원은 그렇게 27년 동안 영덕 주민들의 수호천사로서 그들과 함께 했다. 대도시의 그 어느 병원보다 앞선 의료서비스 제공을 위해 각종 최첨단 의료장비를 갖추었고, 의료계가 들썩이던 의약분업 분쟁기간에도 영덕아산병원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환자들에게 열려있었다. 그리고 요즘은 삼십 년 가까운 시간동안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지역현실에 보다 밀착된 진료체계를 갖추기 위해 더욱 노력하고 있다.


말동무이자 개인주치의가 되어 주는 ‘큰 병원’
병실에서 의사나 간호사가 환자들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들이나 손녀가 친아버지나 친할머니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환자분들이 대부분 연로하신 분들이고 또 모두들 가족같이 친숙하게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게지요. 딱딱한 전문용어보다는 환자들에게 익숙한 사투리로 쉽게 이야기하는 게 타지 출신인 저도 더 편해졌으니까요.”
전주 태생이면서도 8년째 영덕아산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영덕사투리가 더 편해졌다는 김연수 원장은 그렇게 환자들과 친해지고 환자들의 개인적인 생활까지 알게 됨으로써 치료가 용이해지고 회복도 빨라지게 됐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각 과목 선생님들이 모두 대부분 환자들의 개인주치의나 마찬가지예요. 워낙 서로 잘 알고 지내니까요.” 과연 어느 대도시의 어떤 환자들이 영덕아산병원의 환자들처럼 이렇게 개인주치의라고 할 정도의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까하는 부러움이 드는데, 영덕아산병원 직원들은 그것도 모자라 한술 더 뜬다. 매일 독거노인과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찾아다니며 무료진료는 물론이고 지역사회 단체와 연계해 집수리에 생활용품까지 지원해주고 있다는 것.

“촌에서 병원이 있는 시내까지 오는 왕복버스비 몇 천원이 없어서 병원까지도 못 오시는 독거노인들이 의외로 많아요. 그런 분들은 직접 병원차로 모셔 와서 치료를 받게 해야지요.” 창수면 오촌리 강귀분(72세) 할머니 댁으로 방문간호를 나온 임미영 씨의 얼굴에는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하다. 할머니가 식사는 제대로 해서 드시는지, 반찬은 무엇을 드시는지 꼬치꼬치 묻는 것이 영락없는 딸의 모습이다. 그런데 정작 강귀분 할머니는 아픈 몸보다 오랜만에 찾아 온 말 상대가 더 반갑고 고마운 모양이다. 부축을 받고서야 겨우 툇마루에 앉아서 장독대에서 마르고 있는 도토리 가루를 가리키며 몸이 좀 나으면 저걸로 묵을 쑤어 주시겠단다. 그러면서 할머니 집 마당의 노란 붓꽃처럼 수줍게 웃는데 벌써 할머니를 힘들게 하던 병이 반은 사라진 것만 같다.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 의술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찾아 1979년 영덕에 아산병원이 문을 열게 하고 그 정신이 지금도 이어져 저 힘든 분들을 붓꽃처럼 활짝 웃게 하고 있는 것은 분명 의술 그 이상의 무엇이리라. 마음으로써 몸과 마음을 치료하는.


깊어지면서 하늘과의 경계가 사라지는 쪽빛 바다
방문 간호팀과 헤어져 영덕아산병원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 강구항에서 축산면으로 이어지는 918번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만난 해맞이공원에서 너무나 뜻밖의 아름다운 바다를 보았다. 바닷가에 면한 절벽에 지천으로 아슬아슬 피어있는 해당화 연분홍 꽃잎과 하얀 해국. 금방이라도 몸을 던질 듯 바다 쪽으로 기울어진 푸른 이파리들.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거센 파도로 그 푸른 이파리들의 그림자를 끌어들여 품은 쪽빛 바다. 그 바다에 번뜩이며 꽂히는 수만의 은빛 단도들. 쪽빛 바다는 깊어지며 더 먼 바다에서 코발트빛 바다와 몸을 섞고 수평선을 향해 나간다. 그리고 수평선에 다다른 코발트빛 바다는 결국 푸른 하늘과 만나고 그곳에서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무너진다.

그 아름다운 바다가 영덕 주민들에게 여전히 희망과 꿈을 건져 올리는 곳이듯 26년 전 이곳 영덕에 문을 열어 영덕 주민들의 말과 섞이고, 그들의 생활과 섞여 그들의 아들이 되고 무꽃이 되고, 그들의 바다에 피는 해당화가 되고 딸이 되고자 했던 영덕아산병원도 역시 그 바다처럼 영덕의 사람들이 희망과 꿈을 건져 올리는 곳이라는 생각. 영덕 해맞이공원에 서면 그 생각이 쪽빛 바다처럼 더욱 명료해진다.

글·류인호(자유기고가) 사진·이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