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의 문화이야기 파푸아뉴기니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이택광


오늘부터 한 꼭지씩 현대문화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일명 21세기를 ‘문화’의 시대라고도 하는데, 문화란 말에 스민 뜻을 정의하는 목소리도 중구난방인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때문에 문화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고도의 사유가 필요한 복잡한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내가 이 지면을 빌어 여러분께 들려 드리려는 문화에 대한 이야기들은 문화의 테두리를 선명하게 정해 놓고 어떤 것은 문화이고 어떤 것은 문화가 아니라는 식으로 판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랍니다. 다만 문화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나름대로 설명을 드리고, 이런 견해들이 어떤 현실적 근거에서 성립 가능한 것인지를 차근차근 함께 고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불행하게도 동양학을 별로 하지 못했습니다.
대학 시절 전공이 영문학이었던 관계도 있겠지만, 어릴 적부터 읽었던 책들이 대개 서양의 책들이었던 것도 큰 몫을 했습니다. 백지와 같았던 한 아이의 자의식에 처음으로 각인되었던 서양의 이미지들은 지금까지도 내가 서양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는 생각입니다. 비단 이런 경험은 나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닐 터입니다. 오히려 서양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처음으로 비추어 보아야 했던 모든 한국인에게 공통된 것이겠지요. 바로 이런 세계관의 형성을 초래하는 것을 대체로 ‘문화’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법합니다. 서양문화의 세례를 받고 자란 존재가 자신의 경험과 세계관을 성찰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것이 문화에 대한 공부가 우리에게 필요한 까닭이기도 합니다. ‘남’을 공부함으로써 ‘나’를 더욱 선명하게 찾을 수 있는 길, 그 공부길을 걸어서 이제 문화의 숲으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문화에 대한 견해는 주로 서양 쪽에서 다듬어져서, 전세계적으로 퍼져 나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말은 동양이라고 일반적으로 일컬어지는, 서양이 아닌 지역에는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동양에서도 문화에 대한 여러 생각들이 명확하게 존재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국인들이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홍익인간’ 같은 말들은 아주 ‘문화적’인 사회 체계를 암시해 주는 흔적에 해당합니다. 실제로 문화란 것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말하자면, 마치 공기처럼 인간이 있는 곳이라면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한때 서양사람들은 이렇게 요즘은 상식처럼 되어 버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때 서양사람들은 ‘문화’는 서양에만 있는 것으로 굳게 믿었습니다. 영국의 매튜 아놀드(Matthew Arnold) 같은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답니다. 이 사람은 문화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나왔는지를 말해 주는 지표라고 봤습니다. 문화를 자연의 지배로 봤던 것이지요.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당연히 서양은 자연의 지배라는 문제에서 단연 동양을 앞서 나갔습니다. 산업혁명이 이런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이른바 ‘교양주의’란 것이 서양문화의 뿌리로서 자리를 잡게 된답니다.
이런 식의 생각은 문화를 특권화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문화적이어야 사람 노릇을 한다는 고정관념이 이런 바탕 위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문화의 반대말은 ‘야만’이 될 법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관련된 책을 좀 읽어 보신 분이라면, 매튜 아놀드와 같은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들이 주로 자연과학이나 기독교 신학에서 주어진 것이라는 점을 아실 것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이나 자연신학 같은 이론들이 서양인을 동양인보다 우월한 인종으로 간주하도록 만든 측면이 있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이론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론은 이론일 뿐이지요. 문제는 그 이론을 가지고 노는 사람들의 문제랍니다.

이런 문화에 대한 서양의 견해를 뒤집어 놓은 사람은 끌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라는 프랑스의 문화인류학자였습니다.
주로 영국인들의 문화론이 서양 중심주의적이었다면,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은 이런 서양 중심주의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었지요.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서양이 야만이라고 불러온 그 지역에도 문화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파푸아뉴기니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하는 주장이 레비스트로스의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된 이론이 바로 구조주의란 것인데, 이른바 모든 현상은 역사를 통해 형성된 ‘문화적 코드’에 따라서 분석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이론의 요지랍니다. 여기에서 ‘코드’란 말은 우리 말로 습속이나 규범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구조주의는 이런 코드의 체계를 구조로 보는 이론입니다. 이런 습속과 규범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 원주민의 사회도 서양 산업사회 못지 않은 문화적 규율과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레비스트로스의 주장보다 더 과격하게 서양 중심주의에 한방을 날린 사람으로 나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라는 프랑스 철학자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라는 미국의 비평가를 꼽고 싶습니다.
데리다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차후에 이야기를 하도록 하고, 사이드만을 먼저 언급하자면 이렇습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자신의 문제작 ‘오리엔탈리즘’에서, 서양인들이 동양을 배제하고 적대시함으로써, 자신들의 문화를 정립해갔다고 주장합니다. 좀 어렵게 말한다면, 동양을 타자화(他者化)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서양문화가 획득했다는 뜻이죠.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글쓴이 이택광은 문화평론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