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드는 카페 고등학교 동기들이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 풍경 김순란


작은놈을 군대에 보내고

이 글은 큰아들은 미국에, 둘째아들은 군대에 보낸 카페 회원인 김순란 씨가 시차를 두고 올린 글을 모은 것이다



새벽에 큰넘(주훈)이 전화로 제 동생 보내며 제발 우는 모습 보이지 말라구, 눈물이 나도 꾹 참고 보내고 나서 실컷 울라고 잔소리를 해댔다.
논산까지 따라가는 것도 싫다, 터미널까지 따라가는 것도 싫다 해서 아파트 아래서 친구 녀석들과 함께 돌아서는 작은아이 뒤통수를 보며 눈자위를 붉히고 있는데, 저만큼 가던 녀석이 휙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또 들키고 말았네.
집에서 나가기 전에 아빠, 엄마한테 큰절 하는 아이 손을 붙잡고 한 마디만 했어.
“니가 사지육신 멀쩡하여 나라를 지키러 간다니 그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군에 가면 다 너같이 소중한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서로 소중하게 생각하고 잘 지내다 와라. 너는 이제까지도 그랬듯이 잘 해내리라고 믿는다.”
겉으로 말은 도사처럼 했지만 훈련소 보내는 에미 심정이 어디 그렇기만 하겠니. 허나 며칠 전부터 생각해 보니 이 녀석을 두고도 감사할 일이 많아서 감사 기도를 했어.
그리하야 마음이 비교적 차분하네.
이제는 마음 졸이고 눈물 짠들 내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으니 에미로서 기도하는 일이 해줄 수 있는 전부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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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글에서처럼 자식들 빈자리를 보며 그 녀석들의 비중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나아가 다른 사람 자식들의 가치도 똑같다는 걸 묵상하며 살아야지. 그리고 그 자식들을 위해서 그들의 아버지 건강에 좀 더 신경쓰고 내 자신을 잘 가꾸며 살아야지. 여러 면에서 부끄러운 에미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살께.
우리 아이들도 가족들의 빈 자리를 보며 에미와 똑같은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오늘 입영 열차를 탄 씩씩한 대한 남아들 모두 자랑스럽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키워내신 가족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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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엄마.
보내 주신 안경 잘 받았어요. 덕분에 훈련받는 데 훨씬 편해지고. 요즘 들어서 상당히 정신없고 빡센 훈련을 받고 있기 때문에 편지 쓸 시간이 거의 없어요. 몸과 마음이 서서히 지치고 빨리 나갔으면 하는 마음이 커집니다.
그래도 하루에 네 번의 행복을 찾아서 그 순간만 기다리고 지냅니다. 세 끼 식사와 취침할 때. 24시간중 8시간의 수면을 빼면 하루 16시간인데 4번의 기쁨이 있다면 4시간에 한 번 꼴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니 좋은 생활이죠. 목욕도 매일 하고 위생의 문제점도 전혀 없어요. 내무실 동기들이랑도 전부 친해져서 즐겁기도 하고요.
그래도 사회에서 노닥거리는 기쁨의 1억분의 1도 안됩니다. 여기 와서 느낀 점이 있다면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 중 나와 인연이 닿는 사람은 정말 적은데 그런 사람들을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행복이라는 거죠. 분에 넘칠지도 모르는 큰 행복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어서 밖에 나가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요.
혹시 형한테 내 주소 가르쳐 주셨나요? 형이랑 연락이 안되니까 답답하기도 하네요.
항상 나보다 뭐든지 일찍 접해 보고 이것 저것 조언해 주던 더 없이 좋은 선생님이었는데 연락이 안 되니까 약간 앞이 어두워요. 대학에 처음 갔을 때도 형이 없어서 갈팡질팡했는지도 몰라요. 형한테 전화오면 제 주소 좀 가르쳐 주세요.
참 인○(미국 가서 7년 만에 만났던 친구. 귀국해서 학교랑 군 문제 알아보고 있음. 한번 들르겠다고 전화왔었음)는 어떻게 됐는지도 궁금하네요. 우리 집에 초대해서 뭐 좀 해 주시고 그러면 참 좋을 것 같은데….
그리고 가능하면 그 놈 군대 오겠다는 다짐 따위 집어던지라고 전해 주시고요. 으하하.
두 분께 정말 감사드리고 뭐라 말 못할 가슴 뜨거운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일단 여기까지 와서도 제게 이것 저것 신경을 써 주시는 게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안경 받았을 때도 정말 벅찼고, 애들 불러서 저녁해 주셨다는 얘기 들었을 때도 따뜻한 온기를 느꼈습니다. 게다가 여기 와서 느꼈지만 전 정말 유복하고 행복하게 자라 온 녀석이었어요.
그러한 조건을 만들어 주시려고 노력을 해 주신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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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성당이에요. 어제 편지 쓰다가 시간이 없어서 성당 와서 이어 적고 있어요.
옆에 석○도 있는데 얘도 편지 쓰네요. 성당까지 오면서 내일 퇴소하는 애들이랑 잠깐 얘기했는데 그냥 웃음이 나오네요. 걔들이 웃으면서 얘기해줘서 그런지 앞으로 받을 훈련에 대한 걱정 따위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아요.
여기 와서 스스로 놀란 점은 사회에 있을 때보다 훨씬 참을성이 강해졌고 성숙했다는 걸 느끼고 있어요. 아니, ‘참는다’는 인식이 들지 않을 만큼 짜증이 났을 법한 일도 무덤덤하게 넘어가는 날 보며 스스로 대견해 합니다. 참 다행이죠. 성질 내다가 분대장한테 얻어 맞고 하는 걱정은 절대 안해도 될 것 같아요.
에, 또. 하고 싶은 말은 여기 건빵이 진짜 ‘뒈지도록’ 맛있다는 겁니다. 어제도 밤에 꿍쳐 놓은 건빵을 친구랑 나눠 먹었어요.
또 뭔일이 있더라. 아, 그지(친구 별명)한테 편지 왔어요. 부산 해양대학교에서 여기로 바로 왔는데 기분 참 좋았고 그 외엔…. 진짜 이젠 쓸 말이 없다. 미사도 시작하려 하고. 이만 줄일게요.
역시 두 분 다 건강 주의하시고 울적해 하시거나 적적해 하지 마세요. 두 분이 산책 자주 가시고, 시간이 생기는 대로 또 편지 쓸게요.
사랑합니다. 다음까지 안녕히.
2002년 9월15일 둘째 병훈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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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읽어내려가며 녀석 간 지 며칠 안 되는데 철 많이 들었구나, 성질 많이 죽었구나, 걱정 안해도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녀석이 쓴 귀절을 읽으면서 북한이 납치한 일본인들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들이 일본에 있는 가족들을 얼마나 그리워 했을까, 소식 한 자도 전하지 못하는 억류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가슴이 무너졌을까를 생각하며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그들 중 많은 인원이 죽었는데 그들이 수를 다하지 못한 건 아픈 가슴 때문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납치 당시 13살 여중생 딸이 10년 전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 부모가 얼마나 기가 막힐까요. 작은놈이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고 자신의 현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을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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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내 아들 병훈에게
어제는 아빠와 외출했다가 밤 늦게 들어오는데 아저씨가 병훈이 편지 왔어요 하며 네 편지를 주더라. 어찌나 반갑던지…. 며칠 동안 소식이 없어서 무지 궁금했걸랑. 특히 아빠가 애 편지 올 때가 되었는데 안 오냐구, 무슨 사고라도 있는 게 아닌가 염려를 많이 하셨다.
니 편지를 보면서 엄마는 또 눈물이 나더라. 지금도 다시 눈물이 난다.
이층 네 방에서 컴퓨터를 사용할 때도 항상 니 생각이 나고 좀이라도 맛있는 거 먹을 때면 또 너희 둘이 마음에 걸리고….
암튼 네 편지를 보니 많이 씩씩해 보이고 스스로 자기 관리를 잘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안심이 된다.
인○한테서는 귀국했다고 전화가 한번 왔었다. 서울 올 일이 있으면 전화하고 들른다고 했는데 아직 연락이 없어. 그 넘도 이것 저것 알아보고 다니느라고 바쁘다고 하더라.
원○이 녀석은 며칠 전 밤 11시인가 안부 전화도 하더라. 외로워하지 마시라고. 신통한 녀석….
형은 무슨 레벨 테스트(Level Test)를 했는데 25명 중 1등을 했단다. 대체 어떤 넘들이 모였기에 니 형이 1등을 했누.
엄마는 니 형이 잘 해나갈 것을 믿고 있어. 너도 알듯이 형은 꽤나 괜찮은 넘이여. 너도 마찬가지고.
너희들이 없어서 쓸쓸하고 몹시 보고 싶고 할 때마다 엄마는 감사 기도를 한다. 좋은 아들들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리고 잘 보살펴 주십사 청원 기도를 하지.
하느님, 예수님은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바로 니 옆에 그리고 너의 가슴 안에 항상 함께 하신단다. 늘 그 분과 대화를 하며 길을 안내받도록 해라.
석○와 함께 있어서 서로 위로가 많이 되겠구나. 아빠와 엄마는 우리 둘의 건강을 잘 지키는 것이 너희를 위하고 사랑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헬스장에도 같이 가고 운동도 같이 하러 다닌다.
그러니 이곳 걱정은 말고 니 몸 하나 간수 잘 하길 부탁 부탁한다. 훈련 중에도 정신 바짝 차리고 안전사고 나지 않도록 하고.
심신이 약한 아이들이 있으면 말로라도 따뜻하게 위로해 주어라. 사람은 그리 살아야 한단다. 남들이 너를 떠올릴 때면 가슴 한 구석이 따스해지고 입가에 미소를 짓게 되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잘 지내고, 또 쓰마.
2002, 9,19 엄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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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쓴 답장을 부치기 전에 게시판에 올립니다.
작은아이가 훈련소에서 에미에게 보낸 편지를 미국에 있는 큰아이에게 이메일로 보내고 큰아이가 에미의 이메일로 지 동생에게 쓴 편지를 보내면 제가 프린트해서 훈련소로 보냅니다.
중간에 본의 아니게 두 아이들의 속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이번에 큰아이가 쓴 편지를 보면서 두 넘 모두 더 이상 아이가 아닌 장성한 남자라는 걸 크게 느꼈습니다.
제대로 발달 단계를 거치는 것 같아 안심이 되면서 한편으론 서운한 감정도 많이 느껴지더라구요.
어제 저녁엔 남편과 우리의 노년을 위한 계획을 의논하였습니다. 의논이 아니라 실은 남편의 브리핑, 아내의 경청이었지요. 어젯밤 이후 더 부쩍 늙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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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훈….
형이다. 자식…. 오랜만이다.
어떠냐. 헤헤. 만만치 않지? 대한민국 남자들의 위대함을 흠뿍 느끼고 있는가….
난 그 생각이 절실하더라. 나의 아버지를 포함한, 대한민국의 모든 남자들의 끈기와 인내…. 그중의 일원이 되어간다는 뿌듯함. 너무 교과서적이라고 생각하냐. 물론이다. 이젠 ‘교과서’를 이해할 때가 된 거다, 너도….
직접 그 필체를 보진 못했지만 엄마가 이메일로 보내줘서 니 편지 읽었다. 힘드냐?
우선, 미안했다. 그 동안. 뭐랄까 내가 만든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나의 힘이 필요치 않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던 짧은 내 통찰력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좀 더 진득하니 지켜봐주지 못했던 날 미워하게 하는 편지였다. 군바리 주제에 사람을 반성하게 만들다니…. ×새끼 ^^ 넌 거기서 솔직해지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 임마.
그거 아냐? 복무 중에 간간이 집에 왔을 때, 전역하고 집에 왔을 때, 넌 번번이 쑥쑥 성장해 있더라. 분명히 입대하기 전에는 젖비린내 폴폴나던 고딩 내 동생도 당당한 남자가 되어 가고 있다는 걸 까먹은 탓이겠지. 군대 다녀온 나는 그대로인데 내 동생은 간데 없고 왠 선이 굵은 남자가 집에 하나 더 있다는 것은 예전과는 분명히 다른 느낌이었지. 오히려 위협적이기까지 했었나? 전에 없이 서로 으르렁거리기도 몇번 했었지. ^^ 뭘 말하고 싶은지 알겠나?
넌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야. 지금까지는 그걸 니 스스로 몰랐을 뿐이야. 육체적인 강인함? 때로는 중요하지만 그리 크지는 않다. 필요하다면 그런 강인함도 거기서 배워라.
그렇지만 진정한 강인함은 너의 근육보다는 너의 머리에, 너의 머리보다는 너의 가슴에 이미 깃들여 있다. 넌 이미 충분히 강해. 그걸 조절하고 다듬는 시간이 온 거야.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겁내지 마라. 겪어보면 모든 일이 별거 아냐.
너 그 논산 정문 앞에 서 있을 때 내가 전화로 한 말 기억하냐? 뭐랬냐 내가. 축하한다고 했지. 이젠 니 인생을 니가 조절할 수 있는 거야. 그 방법을 2년 동안 배우는 거고. 넌 분명히 똑똑한 놈이지만 지금은 이해가 안된다면 이 편지를 간직해라. 그리고 몇 달에 한번씩 펴봐. ^^ 나한텐 이런 말을 해주는 녀석이 없었어.
나는 아주 좋다. 내일이면 차 산다. 차 사면 컴도 사야겠지. 너한테 위문 편지 열심히 쓰려면….
그런데…. 그렇게 잘 풀려가는데…. 몇몇 기술적인 문제(특히 컴퓨터 & 한국 사회전반 & 팝시장 동향과 레슬 필드)에 봉착하면 숨이 턱턱 막힌다. 왜냐고? 예전처럼 전화하면 모든 걸 삽시간에 파악, 분석해서 브리핑까지 해 주는 니가 없잖나.^^
그게 정말 크다. 때론 정말 힘들어. 이병훈이가 내 옆에 없어서…. 그렇지만 별 수 없지. 그 녀석이 더 강해지기 위한 시간이니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쬐끔 참으면 더 환상적인 비서로 컴백하겠지.

보/구/싶/다/이/놈/아!
그렇게 닮은 점이 없어도, 열여섯 시간이 다른 반대편에 떨어져 있어도, 이렇게 공명하고 있는 게 신기하지 않냐? 그러니까 벌러덩 끝내고 빨리 나와라. 쉽진 않겠지만 말야. ^^
건강해라. 웬만하면 담배는 훈련소에서 끊고…. 그게 젤 좋다. 그리고 안전사고 조심하고….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다칠 일 없다.
분명히 넌 잘 할 거야. 이건 부모님은 몰라도 난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티끌만큼도 의심하지 마라.
힘내고…. 또 쓸게.
이런 말 정말 싫지만…. 제기랄…. 해야 되나….
사랑한다.
2002. 9. 25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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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가진 친구의 리플
믿음직한 아들 있는 사람들 너무 부럽다.
가끔 아들만 둘인 우리 맏동서가 세 남자 여왕 모시듯 받들기에 속으로 부러운 적 있었는데….
순란이는 좋겠다. 이렇게 늠름하고 가슴이 꽉 찬 아들 가진 거 부러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