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소의 여백 0 정훈소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둡고 깊은 우물의 밑바닥, 심연에서
두레박으로
길어 올려졌다 나는 주인 떠난 집처럼
텅 비어 있다
빈집을 돌볼 겸
내가 사물들에게 집을 내어주고 전세 계약을
채결한 이래
나는 언제나 담장 밖 울타리로
내리는 안개에 복면처럼 가려져 있다
복면을 걷어내고 나의 얼굴을 정면으로
가까이 마주한 이는 아직까지
한 사람도 없다
길을 지나다 혹 나와 눈길이라도
마주친 이가 있다면 그는 이미
생의 전부를 들여다 본 셈이다 다만
옛날 어떤 늙은이가 나의 향기에 취하여
몇 줄의 시를 읊다가 떠났을 뿐
사물들은 소풍 나온 아이들처럼 나의 품에 안겨 춤추고
노래하며 잠시 재미있게 놀다가
사라져 갈 뿐
나는 부재다
부재가 아니다

0은 숫자다. 숫자이면서도 아주 이상하고 기묘해서 그 속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풀리지 않을, 난해한 숫자다. 아무것도 없음을 나타내기 위한 기호, 그러면서도 선행하는 앞의 수에 0이 더해질 때마다 열 배, 백 배, 천 배… 그야말로 무한대로 뻗어 나가거나 그것을 나타내는, 나타내기 위한 숫자 0.

먼저 숫자 0의 수학이나 산수 외의 사용처, 그 일반적인 기능을 살펴보고자 한다. 창문을 열고 하늘을 보자. 그리고 방안의 전등은 물론 도시 전체의 불을 모두 껐다고 치자. 별밭을 이루는 밤하늘, 천문학적 단위라는 말이 말해주듯, 하늘의 별들의 숫자를 헤아리거나 그 별들과 별들 사이의 거리를 재고, 오리온 성좌니 전갈좌니 별들의 이름을 지어주고, 그 별들의 중력과 밝기와 수명을 관장하는 천체물리학도 0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눈을 돌려서 현미경적 수준으로 내려가면 0. 000 몇의 소수점 이하의 숫자로 다루어질 수밖에 없는 나노기술이 있고, 무한복제가 가능한, 그래서 원본과 복사본의 구분이 애매한 디지털 기술도 1과 0으로 처리된다는 것. 만약 사람들이 0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이러한 기술은 물론, 현대문명 자체가 전혀 불가능했거나 적어도 지금과는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라는 것.

사람들은 아직도 달나라에 사람이 살고 있거나 계수나무 아래 옥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다고 믿고 있을 것이라는 것. 따라서 유럽의 어느 마을에서는 하느님의 계시와 교황청의 승인 아래 마녀사냥이 계속되고, 무지와 몽매의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것이라는 것.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내가 말할 수 있는 0의 전부다.

그러면 0 자체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며칠 동안 나의 머릿속은 형광등이 켜진 새하얀 백지이고 만년설이 뒤덮인 히말라야 산맥이다. 나는 지금 아주 심한 실어증에 시달리고 있다. 나는 무엇도 말할 수가 없다. 누가 나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머릿속에는 새하얀 형광등을 켜놓은 것일까?

그렇다. 0은 모순이고 이율배반이자 자가당착이다. 그것은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을 말하려는 순간 그것은 스스로의 베일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자가당착에 빠지고 만다. 왜 그런가? 그것을 조금만 더 깊게 들여다보거나 생각해 보라! 그것은 언어 이전의 침묵이고, 새벽의 여명 이전의 어둠이고, 여기 한 송이의 꽃이 피어 있다면, 대지가 꽃을 피워 올리기 이전의 들리지 않는 대지의 신음이고, 도예공의 손을 거치기 이전의 몇 덩이의 흙이다.

여기 한 알의 씨앗이 있다. 땅에 심으면 싹이 트고 언젠가 봄기운에 취하여 꽃을 피울 것이다. 그 작은 한 알의 씨앗은 어떻게 싹을 띄우고 꽃과 열매를 내는가? 작은 한 알의 씨앗 속에 이미 꽃과 싹과 열매가 숨겨져 있고 감추어져 있고 동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꽃과 싹과 열매는 어디서 왔는가?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이나 하겠는가? 다만 우리가 눈이 어둡고 귀가 열리지 않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할 뿐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빛과 어둠, 이런 것들은 전혀 이분법적 구분이 가능하지 않다. 빛은 어둠 속에 들어있고, 어둠은 상호의존적으로 빛에 등 기대어 있다. 기대어 있다는 것은 빚지고 있다는 것이고 언젠가 그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물론 나는 아버지 어머니에게서 왔다. 아버지 어머니는? 또 그 아버지 어머니들은? 또 그…? 또 그…? 또 그…? 이렇게 무한소급이 가능하겠지만 아마 무(無)에서 왔을 것이다. 어디서 왔든, 온 곳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고, 무엇을 하며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고, 결국 온 곳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나는 결국 한 발 한 발 되돌아가고 있다. 나 다음에 올 존재나 사물들도 그들이 묵을 집이나 빈자리가 필요하므로 나도 그들에게 내가 머물던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비어 있고, 이렇게 뿌리내려 지상에 머무르고 있지만, 사실은 한번도 머문 적이 없다.

글쓴이 정훈소는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