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소의 여백 정훈소



자라지 않는 아이가 있었다. 두 살, 세 살, 다섯 살, 일곱 살, 몇 번인가의 봄과 가을이 왔다가 가고, 집으로 초등학교 입학통지서가 날아들어도 도무지 자라지 않는 아이가 있었다. 두 살, 세 살, 다섯 살에 이미 성장을 멈춘 아이가 있었다.
타지 어디에 용한 의원이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소문을 쫓아 몸에 지닌 금붙이며 장롱 서랍 밑, 속곳에 돌돌 말아 숨겨둔 패물을 하나씩 꺼내다 아이를 들쳐업고 차도 다니지 않는 바닷가 갯벌, 4, 50리 길을 한걸음에 달려가는 여인이 있었다.
헝겊으로 만들어진 인형처럼 여인의 등 뒤, 포대기 속에서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꽁꽁 동여맨 포대기 밑으로 자꾸만 흘러내리는 아이가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겨놓을 때마다 흘러내리는 아이를 추스르기 위해 포대기 끈을 풀었다 묶었다 다시 조여 매기를 반복하는 여인이 있었다.
팔 수 있는 금붙이며 패물이 모두 바닥나고 모든 사태를 받아들이며 집으로 돌아가는 여인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여인의 발길, 바닷가 갯벌 속에 푹푹 빠지고 있었다. 바닷가 갯벌 속에 묻힌 발을 옮겨놓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여인이 있었다. 그냥 주저앉고 싶은 여인의 발목을 무엇인가로 친친 감고 놓아주지 않는 바닷가 갯벌이 있었다.

해바라기가 된 아이가 있었다. 해바라기가 되어 해만 바라보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의 형이 가슴에 이름표와 배지가 꽂힌 모자를 쓰고 학교에 가 다른 나라 말을 배워 오고 아이의 동생이 태어나 개구쟁이 짓을 하며 뛰어다녀도, 집안 일이며 밭일이 바쁜 어머니가 내다놓은 집안의 대청마루나 집 밖의 평상을 뒹굴며 하루종일 뚫어져라 해만 바라보는 아이가 있었다.
목을 길게 늘이고 해만 바라보다 쨍쨍 내리쬐는 햇살이 따가워 따가워 가끔씩 눈을 감으면 아이의 동공 속 더욱 환해지고 집채만해지는 해가 있었다. 그래도 아이는 자신의 동공 속, 집채만하게 해가 들어와 뚜덕 뚜덕 집을 짓고 살도록 그냥 내버려두고 있었다.

밭일이며 집안 일이 바쁜 어머니 돌아오지 않고 눕혀놓은 대청마루나 평상 위, 그 자리 그대로 해가 되어버린 해가 있었다.
학교를 갔다오다 평상 위 커다란 해를 책보에 걸러 메고 논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의 형이 있었다. 다시는 지지 않을 것 같던 길고 긴 여름 해가 논길을 따라 터벅터벅 지고 있었다.

사람이 무서운, 사람을 무서워하는 아이가 있었다. 대문 밖,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낯선 구두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마루나 방, 부엌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밥을 먹거나 라디오를 듣다가도 공책이나 신문지를 찢어 딱지를 접다가도 얼른 벽장 속으로 몸을 숨기는 아이가 있었다.
벽장 속에 들어와 있으면 마음이 아늑해지고 숨쉬기가 훨씬 편해지는 아이가 있었다. 벽장 속에서 가족들이 날라다 주는 밥을 먹고, 아이의 형이나 동생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으로 벽장 속에서 놀이를 하고, 하던 놀이가 싫증이 나거나 지치면 벽장 속에서 잠을 자고, 벽장 속에서 꿈을 꾸고, 벽장이 아이가 꿈 꿀 수 있는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아이가 있었다.
벽장 속에 아무리 오래 머물러 있어도 지루함이나 아무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가 있었다. 벽장 속에 몸과 마음이 익어버린 아이가 있었다. 사람들이 돌아가고 이제는 밖으로 나와도 된다고 누군가 벽장문을 열어 주어도 도무지 벽장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아이가 있었다.
벽장 속에 영혼이 갇힌 아이가 있었다. 아이가 들어가 잠을 자거나 누워 있으면 아주 푸근해지고 편안해지는 벽장, 그 벽장 속에 누워 잠을 자는 아이가 있었다. 잠을 자다 가끔씩 깨어나 아무도 보이지 않는 벽장의 어둠 속에서 우우우 소리를 내는… 짐승 같은 아이가 있었다.

글쓴이 정훈소는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