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소의 여백 손을 그리는 손 정훈소



운명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정말 있는 것일까?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자신의 궤도를 따라 돌다가 백색거성이나 블랙홀로 생을 마감하듯, 우리의 생 또한 그렇게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일까? 그래서 아무리 아무리 그 궤도에서 벗어나려 해도 오이디푸스의 비극처럼, 궤도이탈은 불가능한 것일까? 아니 오히려 벗어나려는 몸부림, 그것이 운명을 완성해 가는 수순은 아닐까? 내 임의대로 그 수순을 바꾸어 놓거나 인력과 척력의 궤도 안에 꼼짝없이 묶인 이 사슬을 끊어 버릴 수는 없을까? 그것은 정말 불가항력의 어떤 것일까?

물론 나는 운명론자는 아니다. 내가 운명을 말하기에는 나는 너무나 건강하다. 몸 속을 도는 피는 너무 뜨겁고, 싱싱하고, 푸르기까지 하다. 소나무의 솔잎처럼 나는 벌레먹지 않았고 병들지 않았다. 나의 심장은 분당 몇 수십 번의 펌프질을 하고, 나의 눈은 애욕과 집착으로 먹이를 발견한 짐승의 그것처럼 어둠 속, 푸르고 끈끈한 인광을 발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과거에 대한 아쉬움과 미래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고, 사람을 보면 달려들고 싶은, 물어뜯고 싶은 사기질의 희고 단단한 이빨을 가지고 있다.
뭍가에 모습을 드러낸 개구리나 가을들녘 볏잎 위에 앉은 메뚜기처럼 어디로 뛸지, 다음 순간 나도 나를 장담할 수 없다. 나는 예측불허의 인간이다. 나는 카지노 도박사의 손을 떠나 낙하 중인 주사위이고, 언제 얼굴을 바꿀지 모르는 카멜레온이고, 인면수심의 짐승이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점에서 새벽의 거리에 장막처럼 짙게 깔린 안개다. 그런 내가 어떻게 나의 운명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늙고, 병들고, 나약한 자들이나 말하는 것이다.

…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나 운명에 대해 말하거나 생각한다. 물론 나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왜 그런가? 여기 한 사람의 위대한 성인과,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한 사람의 흉악범이 있다고 치자. 그래서 한 사람은 성인에 합당한 일을 하고, 한 사람은 흉악한 범죄만을 일삼았다고 치자. 우리가 운명을 외부에서 주어지는 어떤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그들은 무대 위의 배우처럼 미리 짜여진 각본대로 연기하고 움직였을 뿐, 우리가 그들을 칭송하거나 비난하여 손가락질할 아무런 도덕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물론 운명은 있다. 내가 나인 것, 나 이외의 무엇도 아닌 것, 그래서 무엇도 될 수 없는 것, 이것은 운명이다. 나도 내가 싫다. 나도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주었으면 좋겠다 싶을 때가 있다. 영원히 영원히 잠적해 버리거나, 나 아닌 다른 무엇이었으면 좋겠다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주어진 것이다. 이미 주어졌고, 움직일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을 거부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다.

화엄론사(華嚴論師)들, 화엄론사들은 상즉상입(相卽相入), 동시호입(同時互入)을 말했다. 그들의 입을 잠시 빌어와야겠다.
여기 거울로 둘러싸인 방이 하나 있고, 그 방안의 중앙에 수정구슬이 하나 놓여 있다. 등불을 가져오거나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거울로 도배된 방은 구슬을 비출 것이고 구슬 또한 구슬을 비추는 방을 비출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말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여기 그들이 자주 사용하는 또 하나의 예가 있다.

한 잔의 물. 이 한 잔의 물은 나에겐 그냥 목마를 때 마시는 물이지만, 공수병에 걸린 어떤 사람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리고 만약 이 물을 사나흘 동안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오아시스를 찾아 사막을 헤매다 쓰러져 죽어가는 어떤 이에게 가져다 준다면 그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수일 것이다. 내가 만약 물에 사는 물고기이거나 플랑크톤 같은 미생물이라면 이 물은 또한 지금의 나의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그 무엇일 것이고, 물은 일반적으로 불을 끄는 것이지만 이 물을 전기분해한다면 물에서 오히려 불을 꺼내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안에 이미 불을 감추고 있는 물. 그래서 다음 문장이 쉽게 얻어진다.
나는 거울 속의 상(相)이고, 상인 동시에 거울 속의 상을 비추는 거울이다. 세상과 운명이 나를 결정하고 만들지만, 나의 일거수 일투족에 의해 세상과 운명이 직조되어 나간다.

그러나 내가 나라고 믿는 것, 모든 것이 나에 의해 직조되어 나가고 결정되어 나간다고 믿는 것, 사실은 전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누군가 장난을 치고 있거나 내가 스스로의 삶이나 운명의 뒷발길에 채여 쓰러져 신음하는 꼴을 히히덕거리며 흡족해하며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
에셔는 그림을 그렸고, 화엄론사들은 사물들의 총체성, 한 터럭의 장애나 걸림도 없이 한 방울의 물 속에 바다가 침수해 들어오는 무애(無碍)의 원리를 말했다. 누가 맞는 것일까? 아니 누가 누구를 베낀 것일까? 역시 에셔의 그림도 어렵고 화엄론사들의 상즉상입, 동시호입의 무애도 어렵다. 다음부터는 이런 글은 쓰지 말아야겠다.

글쓴이 정훈소는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