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소의 여백 가을 3 정훈소




사람을 왜 인간이라 했을까? 왜 사람 ‘人’에 사이 ‘間’을 붙였을까? 옥편이나 국어사전을 뒤져 보면 큰 ‘大’나, 우주라고 할 때의 집 ‘宙’나 자혜로울 ‘慈’나 그밖의 내가 모르는 아름답고 호사스럽고 뜻깊은 글자들이 몇 백 자, 몇 천 자, 그야말로 수두룩한데 왜 하필 사이 ‘間’이었을까? 도무지 만족과 겸손을 모르고 자신을 떠벌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자존심이라는 관점에서, 좀더 고상하고 진취적이고 그럴싸한 명사나 동사를 끼워 넣을 수는 없었을까?

누군가 말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맞는 말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와의 사이와 사이, 관계와 관계 속에 맺어져 있다. 어머니와 나 사이, 스승과 제자 사이, 고객과 물건을 파는 주인 사이,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연인과 연인 사이…. 수많은 관계가 있고 사이가 있다. 그래서 사람을 인간이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인 이상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 있다. 하늘을 나는 새가 숲을 떠나지 못하듯, 인간은 서로의 관계를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다. 로빈슨 크루소는 소설 속에나 나오는 이야기이고 늑대소년은 그냥 늑대일 뿐이다.

어느 시인이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고. 그도 맞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일 것이다. 외롭지 않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냥 밥만 먹고 본능적 행동만을 일삼는다면 짐승에 다름없을 것이다. 한없이 외롭고, 쓸쓸하고, 벌레 먹은 사과처럼 마음이 병들거나, 골다공처럼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려 있거나, 금방 부서질 것 같이 푸석푸석한 것이 인간일 것이다. 그래서 가족을 만들고 자신의 곁에 항상 친구와 사람들을 두고 싶어하는지 모른다. 더러는 외로움을 잊어보려고 술을 마시고, 도박 같은 것에도 빠지고, 또 극단적으로 마약에 의지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런가? 가족이나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데도 왜 나만 홀로 외로움에 몸을 떨어야 하는가?

다시 사이로 돌아가야겠다. 사이? 문법적으로 그 정확한 뜻은 모르겠으나, 사이는 거리이고 틈이고 서로 벌어져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소외이고 균열이다. 아무리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라 해도 너와 나 사이에는 일정한 정도의 거리가 있고, 틈이 있고, 균열이 있다. 그 단순한 예로, 너는 내가 될 수 없고, 설사 네가 아프거나 병들어도 나는 너를 대신해 아파해 줄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누구에게나 개인, 즉 타자다. 나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혼자일 수밖에 없다.

소통, 커뮤니케이션! 나는 누군가와 통화를 원하지만 그는 언제나 통화중이거나 부재중이다. 아니, 설사 그가 곁에 있다 해도, 나의 말은 그에게 먹혀들지 않고 시니피앙, 기표로 떠돈다. 나는 너에게 다가갈 아무런 수단이 없다. 이것이 상대에 대한 집착과 갈애를 낳는다. 나는 그가 나의 말을 듣고 감동을 하고 눈물을 흘려 주었으면 좋겠는데, 내가 전화를 해도 할 말 있으면 빨리 하고 끊으라는 듯 그는 무덤덤하니 수화기 너머 표정 없는 표정, 단절을 볼 뿐이다. 나는 그와의 거리를 좁힐 수 없고 벌어진 틈과 균열을 메울 수 없다. 나의 시니피에, 기의는 어디론가 숨고, 그에게 나는 언제나 기표로 거품처럼 떠돈다.

물론 섹스도 하나의 중요한 방편일 것이다. 상대와의 거리를 좁히거나 다가가기 위한 어떤 행위로서 만약 그들이 남녀 사이라면, 대부분 섹스를 한다. 그러나 섹스만으로는 안 된다.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섹스 그 자체는 아름다운 것도 추한 것도 아닌데, 그것은 너무나 순간적이고 즉물적이다. 그래서 섹스의 이면에는 언제나 허망이 자리하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나는 아직 모른다. 다만 마음의 교합, 정신적 쾌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따름이다. 아무튼 그런 것이 없다 해도 섹스,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나는 다만 그녀, 혹은 그의 내면 깊숙이 손을 더듬어 딱딱한 뼈를 만져보고 싶은데 말이다.

글쓴이 정훈소는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