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소의 여백 죽음 정훈소


알몸의 바다,
바다가 하나 어둠 속에 누워 있다
입술을 거쳐
배꼽, 더 밑,
어둠보다 짙은
거웃…
문이 열려 있다

지상에 안개가 내려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 날 나는
한 발만 내딛어도
그 짙은 어둠 속으로 그만
빨려들 것만 같다


죽음, 이라는 주제는 너무 무겁다. 혹자는 너무 어둡다고 말할지 모른다. 사실이 그렇다. 죽음은 무겁고 어둡고 무섭기까지 한 그런 것이다. 아마 이 세상에 죽음처럼 무겁고 어둡고 무서운 것도 없으리라.
그래서 종교가 생겨나고 윤회와 내세와 하느님을 만들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형이상학을 그들의 머릿속에 정초했으리라.
나는 이 시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죽음에 대해서?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말하려고 이런 시를 쓴 것일까? 그리고 우리들은, 나는,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내세와 윤회는 정말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사람은, 아니 목숨 붙어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결국에 가서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일까? 모든 유정(有情)들이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눈 멀뚱멀뚱 뜨고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도 왜 하필 죽음을 말하려 하는 것일까? 살아서 삶도 제대로 모르는 내가, 죽음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고….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과학자인 가스통 바슐라르는 죽음을 여행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침묵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 왜냐? 나는 아직 살아 있고, 살아 있는 한 죽음에 대해서는 도무지 무지하기 때문이다. 즉 어떠한 말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 우리들은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 굳게 입을 다물 줄 아는 것, 그것이 가장 정직한 것이다.

죽음을 말하기에 앞서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고 삶이 왜 고통스러운가?’를 먼저 따져봐야겠다. 나는 성에서 왔고, 성이라는 이분화된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에서 왔고, 좀더 단순화시켜 어머니에게서 왔다. 어머니와 나는 본래 한몸이었다. 그때 나는 더할 수 없이 행복했었고, 평화로웠다. 지극한 평화와 행복이 나를 감싸고 있었고, 나는 그냥 그것을 즐기고 누리기만 하면 되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어머니에게서 이탈되어 나왔다. 프로이드 식으로 말하면 이것이 문제다. 나는 그냥 어머니의 뱃속에서 엄지손가락 입에 물고 따뜻한 양수 속을 둥둥 떠다니며 살았으면 좋았을텐데, 근심이나 아무 걱정 없이 그대로 머물러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험난한 세상 밖에 내던져졌다. 그것도 전혀 무방비 상태로 말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나의 첫번째 타인이고 한번 세상 밖에 내던져진 이상,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낙원 상실이기도 하다.

삶이 어떤 이분화된 사랑에서 온 만큼, 죽음은 또한 성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나는 왜 외로운가?’, ‘왜 섹스에 집착하고 먹혀들지 않는 사랑에 항상 허기져 있는가?’, ‘허기져서 사람들에게서 항상 무언가를 찾고, 그런 사람들에게서 왜 나 혼자만 상처를 받아야 하는가?’라고, 스스로 자문했을 때, 죽음이 그 얼굴을 가리웠던 복면을 벗고 목을 조금 치켜드는 듯, 이러한 의문들이 이제야 조금 풀리는 듯하다.
즉 나는 태초에, 내가 이 세상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낙원을 찾고 싶었던 것이고, 그곳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던 것이고, 지극히 행복해지고 싶었던 것이다. 어딘가, 무언가를 찾아 되돌아간다는 점에서 그것은 어머니의 뱃속으로의 회귀일 수도 있고, 가스통 바슐라르가 말한 여행일 수도, 본래 없었던 내가 본래 없었던 나를 찾아가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죽음의 입구, 그곳엔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 있길래 그것에 대해 자꾸 말하려 하고 자꾸 들여다보려 하는 것일까? 왜 자꾸 머리를 디밀어 나를 구겨 넣으려고 하는 것일까? 항상 시커먼 음모로 뒤덮여 있어 무섭기조차 한 그곳에….

글쓴이 정훈소는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지금은 삼성동 그의 집에 웅크리고 앉아 처마밑 쳐 놓은 거미줄에 먹이가 걸려들기만을 기다리는 거미처럼 습작과 창작에 몰두하고 있다.시집으로 「아픈 것들은 가을하늘을 닮아 있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