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기울이면 엘가의 아다지오를 들으면 - 재클린 뒤 프레 박종호




영국의 딸
1965년 런던의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명지휘자 죤 바리롤리 경이 이끄는 할레 오케스트라의 콘서트가 열리고 있었다. 모든 관객들의 이목은 불과 20년 3개월 나이의 신인 협연자에게 쏠려 있었다. 이윽고 협연자가 오른손에 첼로를 들고 나타났다. 그는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었다. 훤칠하게 큰 키에 밝은 금발의 생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밝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파안(破顔)하며 들어온 그녀가 무대에 서자 홀 전체가 다 환해지는 것 같았다.

이윽고 의자에 앉은 그녀의 활이 악기를 문지르자, 관객들은 모두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그녀가 연주한 곡은 영국이 자랑하는 작곡가 엘가의 첼로협주곡이었다. 그 곡의 중후한 중량감과 서정적인 우수는 관객들의 폐부에 각인되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그날 깊은 감동을 경험시켜 준 이 젊은 아가씨에게 찬사가 아니라 감사를 보냈다.
옥스퍼드 출신의 이 젊은 여성의 이름은 재클린 뒤 프레였고, 그녀는 단번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이제 영국은 세계에 내놓을 첼리스트를 갖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연주한 엘가의 곡 역시 그녀 덕분에 최고의 첼로 협주곡의 하나로 크게 유명해졌다. 이제 영국은 최고의 첼리스트와 최고의 첼로 협주곡을 모두 갖게 된 것이다.

천사의 사랑
재클린이 데뷔하고 5년간은 자신과 음악계가 모두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뛰어난 음악성으로 아름다운 연주를 사람들에게 선사했을 뿐 아니라, 타고난 발랄함과 재기로 어디를 가든지 자신의 주변을 환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웃음과 명랑함의 천사였고 행복의 화신이었다.
당시는 재클린뿐 아니라 뛰어난 재질을 가진 훌륭한 젊은이들이 많이 나와서 세계 음악계를 고무시킨 시절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바로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주빈 메타,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 바이얼리니스트 이자크 펄만과 핀커스 주커만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하늘이 내린 음악성과 예술적인 열정 그리고 자신들만의 개성으로 세계 음악팬들을 열광시켰다. 또한 이들은 서로 깊은 친분을 나누는 절친한 사이이기도 했다. 그들은 함께 우정을 나누고 종종 함께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재클린은 바렌보임과 전격적으로 결혼을 발표했다. 그녀의 나이 22세 때였다. 물론 바렌보임은 피아노뿐 아니라 지휘의 대가였으며 번쩍이는 재능과 지성의 천재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두 사람의 결합에 무언가 석연치 않음을 떨치지 못했다. 둘의 결합을 가장 반대한 사람은 재클린의 부모였다. 바렌보임이 유태인이란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재클린에 비해 키가 15센티나 작은 유태인과 매력 있는 영국민의 애인의 결합에 섭섭함을 숨기지 않았다. 일부 신문들은 “영국의 장미와 이스라엘 선인장의 어울리지 않는 결합”이라고까지 표현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은 행복하였다. 봄처럼 에너지가 한창 넘쳐나는 나이의 두 젊은이는 서로의 열정과 감각을 자극시켜서, 둘의 멋지고 신나는 음악활동이 이어졌다. 이제는 드물게 성공적인 음악 커플이라고들 불렀다.

누이처럼
그러던 중 재클린이 청천벽력 같은 불치병의 진단을 받은 것은 28세 때였다. 그녀의 병은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것으로 온몸의 신경과 근육이 굳어 들어가는 무서운 병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첼로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점점 그녀는 걷지도 못하게 되고 처음에는 휠체어에 나중에는 침대에만 의지해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를 사랑하던 남편 바렌보임도 결국 그녀를 떠났다.
그녀의 짧았던 42년의 인생은 극명한 명암의 대비로 점철된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첫 14년은 사랑하는 부모님 밑의 행복한 어린 딸로서, 첼리스트로 데뷔한 14세부터의 14년간은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자랑스러운 영국의 딸로서, 그리고 마지막 14년은 아무도 그녀의 절망을 대신해 주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세상으로부터 잊혀져 간 어둠의 딸로서 보냈다. 1987년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는 이미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녀의 미소와 금발이 희미해졌을 시기였다.
그녀는 가고 없다. 그러나 예술이 더 길다고 했던가. 엘가의 협주곡 E단조의 아다지오 악장을 들으면, 마치 그녀가 누이처럼 저편에 앉아 노래를 들려주는 것 같다. 안타까운 운명의 백조처럼….

글쓴이 박종호는 신경정신과 전문의이며, 음악전문 컬럼니스트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