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기울이면 미래를 위해 돌아오다, 클라우디오 아바도 박종호



대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1933~ )는 생존해 있는 지휘자들 중에서 최고의 대가이며, 20세기 후반 세계 음악계의 가장 중요한 두 자리를 거친 대지휘자이다. 즉 그는 1972년 39세의 나이로 오페라계의 메카인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음악감독이 되었고, 빈 필하모니의 수석 지휘자였으며, 카라얀이 사망하자 후임으로 1989년부터 지금까지 최고 명성의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니의 음악감독으로 봉직해 왔다. 그가 카라얀 등 앞 세대 대가들의 자리를 물려받았다는 소식이 들린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의 은퇴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 그도 고희에 접어들었다.

밀라노의 명문
아바도는 이탈리아 음악의 중심지인 밀라노의 음악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가 스칼라에 군림할 때, 밀라노에는 이런 우스개 이야기가 있었다.
한 첼리스트가 있었다. 그는 스칼라 오케스트라에 지원을 했다. 그래서 오디션을 했는데, 감독인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나와서 그를 면접했다. 아마 아바도는 그가 탐탁치 않았던 것 같다. 아바도는 그에게 출신 학교의 추천서를 받아오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베르디 음악원으로 갔다. 음악원장은 아바도의 형이었던 마르첼로 아바도였다. 첼리스트는 마르첼로에게 추천서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스칼라보다 못한 다른 악단에 원서를 내었다. 그곳 지휘자와 만나서 면접을 해 보니, 그는 클라우디오의 사촌동생 로베르토 아바도였다. 오케스트라 일이 탐탁치 않던 첼리스트는 작곡을 하게 되었다. 그는 출판을 위해 이탈리아 최대의 악보 출판사인 리코르디를 찾았다. 담당 매니저를 만났는데, 그녀는 클라우디오의 누이였다. 그리고 오랜 음악 생활 끝에 은퇴한 첼리스트는 나이 든 음악가들의 양로원인 ‘안식의 집’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곳에서 원장을 만나 보니 그는 클라우디오의 아버지였다.



아바도
아바도 가문이 밀라노에서 어떤 위치인가를 풍자한 이야기이다. 베르디 음악원에서 지휘뿐 아니라 피아노와 작곡도 배운 아바도는 나중에 빈에서 스바로프스키에게 지휘를 수학했다. 당시 다니엘 바렌보임, 주빈 메타 등이 동문이었는데, 이제 세계 음악계를 리드하는 거장이 된 세 사람은 지금도 각별한 우정을 유지하고 있다. 당시를 회상할 때 그들이 하는 말 중 재미있는 것은 당시 아바도가 피아노를 가장 잘 쳤다는 사실이다.
특별한 실력을 인정받은 아바도는 불과 32세의 나이로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빈 필하모니를 지휘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어렵기로 유명한 말러 교향곡 2번을 선택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후 오랫동안 스칼라의 감독으로 있던 그는 카라얀이 서거하자, 그 후임이 된다. 그는 당시 베를린 필 사상 처음으로 단원들의 직접투표에 의해서 선택된 영광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바도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특유의 학구적인 자세와 실험적인 입장 등으로 베를린 필은 카라얀 시대만큼 대중의 인기를 누리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종신을 채우지 못하고, 자신의 자리를 떠오르는 젊은 인기 지휘자 사이먼 래틀에게 물려주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은퇴를 전후하여 그는 갑자기 크게 수척해지고 노쇠한 모습을 보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가 위암 판정을 받았던 것이다. 베를린 필도 떠나고 위도 제거한 70세의 아바도-이제 그는 화려한 각광 뒤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사과나무를 심다
그러나 아바도는 돌아왔다. 그는 미래를 위해 돌아온 것이다. 그는 기대되는 청소년들로 구성된 말러 유스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후원하고 있으며, 금년부터 스위스에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발족하였다.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플루트의 임마누엘 파후드, 클라리넷의 자비네 마이어, 바이올린의 콜랴 블라허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들로 구성된 사상 최고의 드림팀이다.
은퇴와 투병과 노쇠 속에서 다시금 불타오르는 그의 열정은 무엇인가? 그는 죽음 앞에서 새로운 사과나무를 심었다. 몇 년을 살 수 있을까?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아바도의 짧지만 불꽃처럼 타오르는 그의 찬란한 마지막 행로를 지켜보게 되었다.

글쓴이 박종호는 신경정신과 전문의이며, 음악전문 컬럼니스트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